‹ 목록으로 얌전한 변태 궁녀

2화

이 마음이 언제부터 시작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정확히 그 날을 짚어 말할 수 있다. 벌써 두 해 전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아니, 선명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눈을 감으면 그날의 빗소리까지 그대로 들리는데, 이게 기억인지 환청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다. 그때 나는 궁에 들어온 지 채 반 년도 안 된 신참 궁녀였다. 뭐든 서툴러서 하루가 멀다 하고 상궁들에게 잔소리를 듣던 처지였고, 세숫물 온도 하나 못 맞춰서 혼나고, 다과상 놓는 순서를 헷갈려서 혼나고, 걸음걸이가 시끄럽다고 혼나던 나날이었다. 그야말로 궁궐 밥값도 못 하는 신세였다는 얘기다. 그날도 비가 쏟아졌다. 장맛비였는지 그냥 여름 소나기였는지는 이제 기억이 흐릿하지만, 빗줄기가 얼마나 매섭게 내려쳤는지는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세탁물을 걷으러 나갔다가 시간에 쫓겨 급하게 뛰던 중이었다. 상궁이 빨래 걷는 데 시간이 이렇게 걸리느냐며 눈을 부라린 게 조금 전이었으니,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급한 마음이라는 게 늘 사고를 부르는 법이라서, 나는 진흙탕에 발이 걸려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우당탕, 소리까지 요란하게 내면서. 하필 그곳이 동궁전 앞뜰이었고, 하필 그 순간 저하께서 처소에서 나오시던 참이었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해야 하는 건지 지금도 헷갈린다. 아무튼 나는 흙탕물에 처박힌 채로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저하의 그 사파이어빛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게 느껴졌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부끄러움 때문인지 놀라움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고, 손끝이 저릿저릿한 게 진흙탕의 차가움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라고 나중에야 생각했지만 그 순간엔 그저 얼어붙어 있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쉬었던 것 같다. 아니, 숨을 쉬고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저하께서는 손을 내밀려는 듯 몸을 살짝 숙이셨다. 그 몸짓이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게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움직이셨다. 나는 그 순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저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될까. 물론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상황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지만. 그런데 그 손이 채 뻗기도 전에 뒤에서 상궁의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저하! 궁녀의 몸에 손을 대시면 아니 되옵니다!" 목소리가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빗소리를 뚫고 앞뜰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순간 저하의 손이 멈췄다. 나는 그 손이 허공에서 뚝 멈추는 걸 눈앞에서 봤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저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 걸 봤다. 그 표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화가 난 것도 아니고, 당황한 것도 아니고, 그냥 뭔가를 삼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규율이라는 걸 삼키는 얼굴, 이라고 하면 좀 거창한가. 저하는 손을 다시 거두시더니, 대신 곁에 서 있던 시녀에게 낮게 명하셨다. "저 아이를 일으켜 세워라. 다치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명령이면서도 걱정이 배어 있는, 그런 이상한 온도의 말투였다. 시녀가 서둘러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우는 동안 나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는데, 그러고는 나를 향해 시선을 한 번 더 던지셨다. 그게 다였다.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걸음을 옮겨 가버리셨다. 발걸음 소리조차 조심스러웠던 것 같은데, 그건 내 착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짧은 순간이, 손을 대지 않으면서도 나를 배려하려 했던 그 태도가 머릿속에 박혀서 지워지지 않았다. 시녀가 나를 부축해 처소로 데려가는 동안에도, 상궁에게 또 한 소리 듣는 동안에도, 젖은 옷을 갈아입고 이불 속에 들어가서도 그 장면만 계속 재생됐다. 손이 멈추는 그 순간, 표정이 굳는 그 순간, 그리고 나를 향해 던진 그 짧은 시선.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궁에서 궁녀가 넘어지는 건 흔한 일이었고, 왕세자가 궁녀를 잠시 신경 써주는 것도 특별한 은혜는 아니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나는 그저 재수 없게 넘어진 날이었다고 하루 정도 앓다가 잊어버렸을 거다. 그런데 그 손이 멈추는 순간의 표정, 규율을 어기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나를 외면하지 않았던 그 눈빛이 나를 완전히 무너뜨려버렸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랑에 빠졌다는 건 나도 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웃길 노릇이다. 손 한 번 못 잡아본 사이에,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눈 적도 없는 사이에, 그냥 어떤 표정 하나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게.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유를 따져서 움직이는 게 아니잖아. 심장이라는 놈은 원래 그렇게 멍청하게 작동하는 물건인가 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저하가 지나가는 길목을 외워두고, 저하의 일과를 파악하고, 심지어 저하께서 좋아하시는 다과의 종류까지 알아냈다. 유자차보다는 대추차를 즐기신다는 것, 오후 나절에는 서고에 들르는 시간이 많다는 것, 걸음이 빠르지만 계단을 오를 땐 늘 왼발을 먼저 딛는다는 것까지. 이게 사랑인지 집착인지 스스로도 헷갈릴 지경이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나는 이 감정을 절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문제는 이 감정을 품고 사는 게 이 궁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짓이라는 거였다. 정통 후궁이 아닌 이상 왕세자 저하와의 신체 접촉은 절대 금지되어 있었고, 그걸 어기는 자는 벌을 받는다는 게 이 나라 궁궐의 법도였다. 나는 그저 궁녀 나부랭이일 뿐인데, 감히 저하께 손을 대는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죄를 짓고 있는 셈이었다. 상상만으로 죄가 되는 게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여기 있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이 궁궐이 그런 곳이다. 그런데도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오늘 저하를 얼마나 가까이서 볼 수 있을지를 먼저 계산하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세숫물을 데우면서도, 다과상을 나르면서도, 빨래를 널면서도 머릿속 절반은 그 계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참 대단한 정신 상태다, 이서윤. 스스로를 비웃으면서도 나는 오늘도 저하께서 지나가시는 길목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니, 이게 병이 아니면 뭘까. 상사병이라는 말이 왜 병이라는 글자를 달고 다니는지 이제야 알겠다. 그날 이후로 두 해가 지났고, 나는 여전히 저하의 근처에서 서성이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승진도 못 하고, 다른 데 마음을 붙이지도 못하고, 그냥 이 자리에서 저하의 동선만 외우고 있는 궁녀. 이게 청춘을 낭비하는 방식으로는 최악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했다. 현조가 나를 그렇게 못마땅하게 보는 것도 아마 이 두 해 동안 내 눈빛에서 뭔가를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인간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는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곁눈질 한 번으로 사람 속을 읽어내는 재주가 있는데, 그게 나한테는 재앙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오후, 그 눈치의 진짜 무게를 뼈저리게 느낄 일이 벌어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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