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얌전한 변태 궁녀

5화

현조를 찾아가기로 결심한 건 순전히 절박함 때문이었다. 내실 시중이라는 자리가 나를 얼마나 위태롭게 만들지 하루 동안 생각해보니 답이 나왔다. 이건 정면 돌파가 아니라 후퇴 작전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후퇴를 승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저 인간이었다. 밤새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온갖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첫 번째, 그냥 병을 핑계로 며칠 자리를 비운다—너무 뻔해서 바로 들킨다. 두 번째, 다른 궁녀에게 뒷돈을 주고 자리를 바꾼다—애초에 내게 뒷돈 줄 돈이 없다. 세 번째, 현조에게 직접 말한다—이건 정말 최악의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유일하게 실현 가능성이 있는 선택이었다. 인생이 참 공평하지가 않다. 최악과 유일이 같은 자리에 앉아 있으니. 그래서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동궁전 별채 근처를 서성였다.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몇 번이나 발걸음을 돌렸다가 다시 돌아왔는지 모른다. 지나가던 나이 든 상궁 하나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길래 나는 괜히 화단 앞에서 꽃을 구경하는 척까지 했다. 꽃이 예쁘긴 개뿔, 내 머릿속은 이미 지옥이었다. 결국 해가 중천에 뜰 때쯤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고서야 안으로 들어섰다. 심장이 벌써부터 미친 듯이 뛰고 있었는데, 이게 긴장인지 공포인지 아니면 그냥 아침을 걸러서 저혈당인지 구분이 안 됐다. 현조는 마침 서책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 표정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미 반쯈 기가 죽었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냐." "내관님께 청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심장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이 인간 앞에서 태연한 척 연기하는 게 이제는 특기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아니, 특기라기보다는 생존 기술이라고 해야 정확하겠다. "청이라. 말해보아라." "이번에 제가 내실 시중으로 배정받았는데, 아직 경험이 부족하여 실수를 저지를까 걱정이 됩니다. 혹시 다른 궁녀와 자리를 바꿀 수 있을지, 내관님께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 궁색한 변명이었다. 경험이 부족해서라니. 그럼 지금까지는 뭘 그렇게 열심히 지켜봤단 말인가. 논리가 완전히 자기 발등을 찍고 있었지만, 이 순간에는 그것 말고 내놓을 게 없었다. 현조가 서책을 내려놓고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눈빛이 너무 날카로워서 나는 순간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고 싶었지만, 겨우 버텨섰다. 발가락에 힘을 꽉 주고, 무릎이 후들거리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이런 게 바로 사경을 헤매는 심정인가 보다. "경험이 부족해서라, 그것 참 재미있는 이유구나." 현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는데, 그게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구분이 안 됐다. "내가 알기로 너는 지금까지 저하의 동선을 누구보다 훤히 꿰고 있던 아이인데, 이제 와서 경험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니 말이다." 씨발. 나는 속으로 그 한마디를 삼켰다. 이 인간이 진짜로 다 알고 있었구나. 지금까지의 내 행동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었고, 그렇다면 이번 청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게 뻔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처음부터? 아니면 최근 며칠? 어느 쪽이든 소름이 돋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그건 저하께 무례를 범할까 두려워 미리 살펴보았을 뿐입니다." 나는 겨우 그렇게 둘러댔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걸 감추지 못했다. 이 정도 변명으로 넘어갈 거라고 스스로도 믿지 않았다. 그냥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내뱉은 말이었다. "살펴보았을 뿐이라." 현조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 걸음걸이가 어찌나 여유로운지 오히려 그게 더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사냥감을 몰아넣는 짐승처럼,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확실하게 거리를 좁혀왔다. "내실 시중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게 네 진짜 속마음이냐,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게냐." 나는 그 질문에 순간 말을 잃었다. 진짜 이유를 말할 수는 없었다. 저하를 너무 사랑해서 오히려 가까이 있는 게 위험하다는 걸, 이 인간 앞에서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말을 꺼내는 순간 내 목숨이 어떤 식으로 끝장날지 상상만 해도 오싹했다. "그저... 실수가 두려울 뿐입니다." 나는 겨우 그 말만 반복했다. 머릿속에서는 수십 가지 변명이 떠올랐다가 곧바로 폐기됐다. 뭘 말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다 구멍투성이였다. 현조가 나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째 순순히 봐주는 것 같지 않아서 불안했다. 그냥 재밌어하는 웃음이었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를 구경하는 고양이의 웃음. "두려움이라." 현조가 팔짱을 끼며 나를 훑어봤다. "네가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부터가 흥미롭구나. 지금까지 네가 저하 곁을 맴돌던 걸 보면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아이인 줄 알았는데." "..." "자리를 바꿀 생각은 없다." 현조가 단호하게 말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네가 얼마나 법도를 잘 지키는지 지켜볼 생각이야. 만약 조금이라도 규율을 어기는 낌새가 보이면, 그때는 곤장이 아니라 궁 밖으로 완전히 내쫓길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하늘이 노래지는 걸 느꼈다. 회피는커녕 오히려 더 강한 감시망에 걸려들었다는 뜻이었다. 이 인간은 내 청을 들어주는 대신, 나를 더 촘촘한 그물 안에 가둬버린 셈이었다. 이럴 거면 애초에 찾아오지를 말았어야 했나. 아니, 안 찾아왔어도 어차피 내실 시중은 확정이었을 테니 결과는 똑같았을지도.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겨우 그 말만 내뱉고 물러났다. 뒷걸음질로 몇 걸음을 물러나다가 문턱에 발이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는데, 그 와중에도 현조의 시선이 내 등을 따라오는 게 느껴져서 넘어지지도 못했다. 자존심 하나는 끝까지 붙잡고 있었나 보다. 별채를 나서면서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꼈는데, 이게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스스로도 구분이 안 됐다. 담판은 완벽하게 실패했다. 오히려 내 처지는 더 나빠졌고, 내실 시중이라는 자리는 이제 도망칠 수 없는 확정 사항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감시까지 더 붙었으니, 이건 후퇴 작전이 아니라 자폭 작전이었던 셈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찼다. 그날 밤, 나는 내일부터 시작될 내실 시중을 앞두고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불을 덮었다가 걷어찼다가, 다시 덮었다가 또 걷어차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훌쩍 넘어가 있었다. 저하와 매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목숨이 위태롭다는 걸 알면서도 심장을 뛰게 만들고 있었으니, 이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사랑이라는 감정의 부작용인가. 좋으면서 무섭고, 무서우면서도 계속 그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차라리 미워하는 감정이었다면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좋아하는 마음이라 매 순간이 도박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별채를 나서는 길,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스쳤다. 처음엔 그냥 착각이겠거니 했다. 밤이라 그런 거겠지, 낮에 너무 긴장해서 신경이 곤두선 탓이겠지. 그렇게 넘기려 했는데, 그 느낌이 한 번이 아니라 몇 걸음마다 반복해서 따라붙었다. 돌아봤을 때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 시선의 잔상이 오래도록 등줄기에 남아 있었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현조가 아니었다. 현조의 시선은 날카롭고 여유로운 종류였는데, 이건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결의 시선이었다. 그보다 훨씬 낮고 조용한, 그러면서도 소름이 돋는 시선이었다. 마치 어둠 그 자체가 나를 관찰하는 것 같은, 존재감을 최대한 죽인 채로 나를 훑어보는 느낌. 누구였을까. 그리고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궁 안에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눈이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냥 내가 너무 긴장한 탓에 헛것을 느낀 걸까. 어느 쪽이든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나는 그 답을 알지 못한 채로, 내일 있을 첫 내실 시중을 향해 걸음을 옮겨야 했다. 뒤통수가 계속 저릿저릿한 느낌을 애써 무시하면서, 애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밤, 나는 결국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