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홍 여사를 대면한 다음 날, 강준서는 정식으로 그녀를 해고하려 했다.
마음은 벌써 정해져 있었다. 그 손목을 붙잡던 손, 아이의 얼굴에 스치던 그 짧은 공포.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박수호에게 서류를 준비하라고 지시했지만, 돌아온 답은 예상 밖이었다.
"공작님, 증거가 없으면 안 됩니다."
강준서는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증거가 없다니. 자기 눈으로 본 게 증거가 아니면 뭐가 증거란 말인가.
"어제 내 눈으로 직접 봤잖아요." 강준서가 답답한 얼굴로 말했다.
"공작님이 보신 건 손목을 잡은 장면뿐입니다." 박수호의 설명은 냉정했지만 사실이었다. "그것만으로는 학대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홍 여사 쪽에서 '예절 교육 중 넘어지신 것'이라 주장하면, 반박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럼 그 여자가 죄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법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박수호가 한숨을 눌러 삼켰다. "이런 집안일수록 뒷말이 무섭습니다. 섣부르게 자르면 오히려 아가씨한테 불리한 소문이 돌 수도 있어요."
강준서는 이마를 짚었다. 이럴 때 보면 박수호는 지나치게 침착했다. 화가 나야 할 상황에서도 서류와 절차부터 따지는 걸 보면, 저 남자는 정말로 이 저택에서 오래 굴러먹은 사람이 맞았다.
"...그럼 어떻게 해요."
"증거를 모아야 합니다." 박수호가 짧게 정리했다. "목격자, 상처의 기록, 반복된 패턴. 하나라도 확실한 게 나오면 그때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강준서는 그 말에 뭔가 안심이 되면서도, 동시에 속이 뒤틀렸다. 딸의 상처를 '증거'라는 단어로 부르는 순간이 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잘못된 일 같았다.
강준서는 그날 오후 소은을 다시 찾아갔다. 아이의 방문이 조금씩 열리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처음엔 문틈으로 눈만 내밀던 아이가, 이제는 문고리를 잡고 반쯤 몸을 내밀 정도가 되었다. 이번엔 소은이 먼저 문을 열었다.
"아빠." 소은이 처음으로 그렇게 불렀다.
그 한마디에 강준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겨우 두 음절이었는데, 마음속 어딘가가 뻐근하게 저려왔다. 살면서 이렇게 짧은 단어가 이렇게 무겁게 박힌 적이 있었나, 싶었다.
"응, 아빠 왔어." 목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져 나왔다.
***
소은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저택 뒤편 정원으로 향했다. 아이의 걸음이 유난히 익숙했다. 마치 수백 번은 다녀본 길처럼, 잡초 사이의 돌부리까지 정확히 피해 갔다.
강준서는 그 뒷모습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저택에 산 지 며칠 안 된 아버지보다, 네 살짜리 딸이 이 정원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정원 끝, 낡은 창고 뒤편에 담쟁이덩굴로 가려진 작은 틈이 있었다. 소은이 그 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강준서는 놀란 얼굴로 뒤따랐다. 어른의 몸으로 그 틈을 지나가려니 어깨가 걸려서, 옷자락이 담쟁이 덩굴에 걸리는 소리가 났다.
틈 안쪽은 작은 공간이었다. 오래된 나무 상자를 뒤집어 만든 의자, 낡은 담요, 그리고 벽에 그려진 서투른 그림들. 그림 속에는 은빛 머리의 두 사람과 검은 머리의 한 사람이 손을 잡고 서 있었다. '가족.' 강준서는 단번에 그 뜻을 알아챘다.
그림은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팔이 몸통보다 길고, 눈은 짝짝이였다. 그런데도 세 사람의 손이 모두 맞잡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누구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여기 뭐야?"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제 방이에요." 소은이 작게 웃었다. "아무도 몰라요. 아프면 여기로 와요."
'아프면 여기로 와요.' 강준서는 그 말을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네 살짜리 아이가 아플 때 찾아갈 곳이 담쟁이덩굴 뒤 틈새라는 사실이, 그 어떤 학대의 증거보다도 선명하게 그를 후려쳤다.
강준서는 담요 위에 흩어진 몇 개의 물건을 보았다. 낡은 손수건, 작은 조약돌, 그리고 구겨진 종이 한 장. 손수건은 색이 다 바랬고, 조약돌은 손으로 하도 만져서 반질반질했다. 종이를 펼치자 서투른 필체로 쓴 글자가 보였다.
'아빠, 엄마 사랑해요. 근데 말 못해요.'
손끝이 떨렸다. 강준서는 그 종이를 조심스레 접어 품에 넣었다. 왜 말을 못 했을까. 그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소은아, 이제부터 여기 안 와도 돼." 그가 아이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아빠가 지켜줄게."
소은은 그 말을 이해했다기보다는, 그저 아버지의 눈빛이 낯설게 따뜻하다는 사실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아무 대답 없이, 손에 쥔 조약돌을 만지작거렸다. 오랫동안 혼자 만지던 버릇대로.
***
그날 밤, 강준서는 은신처에서 발견한 물건들을 박수호에게 보여주었다. 서재 탁자 위에 담요와 조약돌, 손수건을 늘어놓으니 꼭 압수 수색을 나온 형사처럼 보였다.
"이게 얼마나 오래된 거예요?" 그가 낡은 담요를 가리키며 물었다.
박수호는 담요를 만져보고는 얼굴이 굳었다. 손끝으로 실밥을 몇 번 훑어보고, 색이 바랜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적어도 반 년은 넘었을 겁니다. 이런 게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도 몰랐다고요?" 강준서가 놀라 물었다. 박수호라면 저택의 구석구석까지 다 꿰고 있을 줄 알았다.
"저택이 워낙 크니까요." 박수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게다가 아가씨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부담이 될까 봐서요."
네 살짜리 아이가 부모에게 부담이 될까 봐 자신의 상처를 숨겨왔다는 사실이, 강준서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 아이는 대체 어떤 시간을 견뎌온 거지.'
강준서는 그 종이쪽지를 다시 펼쳐 박수호에게 보여주었다. 박수호는 그것을 읽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뭐라도 냉철한 조언을 던졌을 사람이, 이번엔 그저 종이를 든 손을 내려놓았다.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알아봐야겠어요." 강준서가 결연히 말했다. "홍 여사 그 사람, 배후가 뭔지 알아야겠어요."
박수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건 공작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일일 겁니다."
"왜요?" 강준서가 눈을 좁혔다.
박수호는 대답 대신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쪽 별채 쪽에서 불빛이 아직 꺼지지 않고 있었다. 늦은 밤인데도, 홍 여사의 방에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강준서도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 너머 그림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둘, 어쩌면 셋. 흐릿한 형체가 겹쳐지고 갈라지기를 반복했다.
"저 시간에 누가 찾아온 거예요?" 강준서가 낮게 물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박수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홍 여사가 이 저택에 들어온 게 삼 년 전인데, 그 전 경력이 이상하게 비어 있습니다. 추천서를 낸 사람도... 확인이 잘 안 됩니다."
"확인이 안 된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저것부터 알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박수호가 낮게 중얼거렸다. 대답을 피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아는 게 없어서 나오는 말이라는 게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강준서는 그 그림자를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저 창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고 복잡한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고, 서쪽 별채의 불빛은 자정이 넘도록 꺼지지 않았다.
강준서는 한동안 그 불빛을 바라보다가 문득 소은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은 잘 자고 있을까."
그 생각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아이의 방문 쪽으로 향했다. 문은 열지 않았다. 다만 문밖에 잠시 서서 안쪽의 작은 숨소리를 확인한 뒤에야 조용히 돌아섰다.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낸다.'
강준서는 처음으로 그 다짐을, 누구도 아닌 자신의 가족을 향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