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차인 영애, 공작의 선택

1화

내 아버지, 이경덕 백작은 나를 여섯 살 때부터 예비 며느리로 키워달라며 옆 가문에 보냈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그냥 짐 몇 개를 챙겨서 마차에 태워졌고, 낯선 저택에 도착해서는 또래의 남자아이 하나를 소개받았을 뿐이었다. 그 옆 가문의 장남이 한지훈이었다. 열두 살에 정식으로 혼약이 성립됐고, 그로부터 육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그의 혼약녀였다. 육 년이면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매일 얼굴을 보고, 매일 안부를 묻고, 매일 같은 학원 복도를 걸었으니 말이다. 적어도 오늘 아침까지는 그랬다. 복도를 지나가는데 한지훈이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려고 걸음을 늦췄다. 육 년이나 해온 일이었으니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봤는데 안 본 척했다. 시선이 스치듯 내 얼굴을 지나쳐서 벽에 걸린 그림으로 옮겨갔다. 그 그림은 등제학원 창립자의 초상화였는데, 한지훈이 지금까지 그 그림을 눈여겨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손을 반쯤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지금 저건 뭐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람이 딴생각에 잠기면 눈앞의 사람도 못 알아볼 수 있는 거니까. 그런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들이 그 상황을 다르게 설명해주었다. "저거 봤어? 한지훈 공자님, 어제 윤소라 양이랑 정원에서…" "응, 나도 들었어. 벌써 사교계에 다 퍼졌다던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었다는 얘기까지 있어." "거기다 그거 아냐? 이서윤 영애랑 파혼 얘기까지 나온다던데." "이서윤 영애는 알고 있나?" 나는 알고 있지 않았다. 방금, 지금, 이 순간에서야 알았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는데, 딱히 다리가 움직이질 않아서였다. 등 뒤로 지나가는 학생들의 시선이 하나둘 내 쪽으로 꽂히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어제 윤소라와 정원에 있었다는 건,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다.' '아니, 사교계에 퍼졌다는 건 우연이 아니라 공표라는 뜻이다. 파혼 얘기까지 나온다는 건, 이미 결론이 났다는 뜻이고.'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문장들이 자꾸 흩어졌다. 나는 그냥 서 있었다. 복도 한가운데, 오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혼자 멈춘 채로. 그때였다. 복도 끝에서 소란이 일었다. 학생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추고 한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방금까지 나를 두고 수군거리던 목소리들도 순식간에 다른 화제로 옮겨갔다. "강시우 공자님이시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고, 그 이름 하나에 복도 전체의 공기가 바뀌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장신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금발 숏헤어에, 걸음걸이만으로도 시선을 끄는 사람이었다. 딱히 화려하게 꾸민 것도 아닌데, 걷는 자세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등제학원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세하 공작가의 장남, 차기 당주. 재학생 중 가장 높은 신분이었고, 성적으로도 매년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으며, 그 외의 다른 이유로도─이를테면 그냥 존재만으로도─학원 안에서 화제가 되는 인물이었다. 나는 그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같은 학년이었지만 반이 달랐고, 사교 모임에서 몇 번 마주쳤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은 늘 익숙했다. 워낙 자주 들려오는 이름이었으니까. 그가 걸어오는 방향에 한지훈이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쳤을 때, 나는 뭔가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냥 지나갈 줄 알았다. 신분 차이가 있으니 가벼운 목례 정도, 딱 그 정도의 접촉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강시우가 걸음을 멈췄다. "한지훈." 짧은 부름이었는데, 한지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어, 강 공자. 오랜만이네." 한지훈의 목소리에 억지스러운 여유가 묻어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육 년 동안 들어왔기 때문에, 그게 진짜 여유가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소문 들었다." 그게 전부였다. 강시우는 그 한마디를 던지고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그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왜 나를 보는 거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그 짧은 순간 복도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왔다는 걸 느꼈다. 등이 뜨거워졌다. 그렇다고 시선을 피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서,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마주 보았다. 한지훈은 그 자리에서 얼굴이 붉어진 채 아무 대꾸도 못 했다. 평소라면 뭐라고든 응수했을 텐데, 지금은 강시우의 짧은 말 한마디에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강시우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를 지나칠 때, 그가 작게 말했다. "괜찮습니까." 딱 그 두 마디였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이미 지나간 뒤였다.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고,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흘리듯 던진 말이었는데,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복도에 남은 건 나와,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서 있는 한지훈과, 수십 개의 시선이었다. '괜찮냐고?' 괜찮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왜 괜찮지 않은지, 정확히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파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육 년 동안 봐온 얼굴이 나를 못 본 척했다는 것 때문인지, 혹은 방금 지나간 그 짧은 말 때문인지. 한지훈이 나를 슬쩍 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는 그냥 그렇게 등을 돌렸다. 그가 걸어간 방향 끝에, 리본을 단 금발의 소녀가 서 있었다. 윤소라였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이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본 얼굴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며 웃었다. 아주 작게, 고소하다는 듯이.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그때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해하게 될 거라는 것만은, 이상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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