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차인 영애, 공작의 선택

3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오래 바라봤다. 거리의 가로수들이 지나가고, 상점들의 간판이 스쳐 지나갔다. 평소라면 눈에 담아뒀을 풍경들이었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파혼당했다는 걸 알리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나도 알릴 필요 없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몸이 좌석에 부딪혔고, 나는 그 흔들림에 맞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정작 방에 혼자 있을 때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육 년이었다. 열두 살 때부터 한지훈과 함께 다니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명절마다 그의 집에 초대받았고, 그의 부모님은 나를 며느리라고 불렀다. 그의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떡을 항상 챙겨두셨고, 그의 아버지는 나를 볼 때마다 "우리 서윤이"라며 웃으셨다. 그 모든 시간이 이제 와서 그냥, 정리된 사안이 됐다. 나는 방 안 책상 앞에 앉아 아버지가 보내준 편지를 다시 꺼내 읽어봤다. 종이는 이미 몇 번이나 접었다 펴서 구겨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사실상 정리된 사안이라 보면 된다. 감정적으로 대응할 필요 없다. 가문의 입장에서 손해될 일은 없으니, 평소처럼 지내면 된다.」 아버지의 문체는 늘 이렇게 실무적이었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사실만 나열하는 문장들. 편지 어디에도 '괜찮니'라는 말은 없었다. 어쩌면 나도 아버지를 닮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슬프다는 감정보다,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먼저 계산하고 있었으니까. 학원에서 마주칠 사람들, 그들이 던질 질문들, 내가 준비해야 할 표정까지도. 하녀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저녁 준비됐습니다." "안 먹을래." "그래도,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드셨는데…" "괜찮아. 안 먹을래." "죽이라도 조금 드시는 게…" "괜찮다니까." 하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문 밖으로 물러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나는 손끝으로 편지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종이 끝이 닳아서 부드러워질 때까지 계속. 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방 안의 불빛만이 책상 위를 밝히고 있었다. 나는 그 불빛 아래서 오래도록 편지를 내려다봤다. '울 필요는 없다.' '울면 진 것 같으니까.' 그런데 눈이 뜨거워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목 안쪽이 답답해지고, 코끝이 시큰거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표정을 정리해뒀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다음 날 학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걸었다. 등을 곧게 펴고,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로. 누군가 나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모르는 척했다. 교실로 들어가는 복도에서, 윤소라와 마주쳤다. 그녀는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나에게 인사를 했다. "이서윤 언니, 안녕하세요." 나는 그녀와 친분이 없었다. 자작가 영애인 그녀가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우리는 학년도 같았고, 나이도 겨우 몇 달 차이였다. "…안녕." 그녀는 내 옆에 자연스럽게 붙어 걸으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지훈 오빠랑 정원에서 있었던 일, 언니도 아시죠? 괜히 불편하게 만든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녀의 말투는 상냥했지만, 눈빛은 전혀 상냥하지 않았다. 마치 내 반응을 하나하나 채점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불편하지 않아." "그래도 혼약자였는데, 좀 서운하지 않으세요? 육 년이나 사귀셨다고 들었는데." "안 서운해." "진짜요? 저는 언니가 많이 힘들어하실 줄 알았어요. 다들 그렇게 말하던데." "안 힘들어." 그녀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 표정에서 뭔가를 찾으려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감정을 다 정리해둔 얼굴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다행이에요. 저희, 사이좋게 지내면 되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웃으며 자리를 떠났고,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학생 몇몇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재빨리 눈을 피했다. 나는 그 웃음의 뒷면에 있는 감정을 정확히 읽었다. 고소함이었다. '나를 이겼다고 생각하는구나.'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지는 게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그냥 상황을 받아들이려고만 했는데, 처음으로 다른 감정이 스며들었다. 지고 싶지 않다는 감정.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는 동안, 나는 계속 그 감정을 곱씹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학생들, 그들의 대화 속에 섞여 있을 내 이름과 소문들. 그런데 무엇을 이기고 지는 건지는, 나도 아직 정확히 몰랐다. 책상 위에 손을 얹은 채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지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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