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비가 오는 날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하늘은 그저 흐릿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후 수업이 끝나갈 무렵부터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학원 정문을 나설 때는 이미 제법 굵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뒤졌다.
우산이 없었다.
'분명 챙겼는데.'
아침에 현관에서 챙겼던 기억이 선명한데, 어디서 잃어버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강의실에 두고 왔을 수도 있고, 복도 어딘가에 세워두고 왔을 수도 있었다.
'다시 들어가서 찾을까.'
하지만 이미 강의실 문은 잠겼을 시간이었다. 나는 처마 밑에 서서 빗줄기를 바라보며 계산을 시작했다.
'여기서 마차까지 거리가, 대충 오 분 정도.'
'뛰면 삼 분.'
'그 정도면 옷이 반쯤은 젖겠지만 감기까지는 안 걸릴 거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옆에서 우산이 펼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톡, 하고 우산살이 펴지는 익숙한 소리.
돌아보니 강시우였다.
그는 검은 우산을 든 채 나를 보고 있었다. 표정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방향이 같으니, 같이 쓰시죠."
나는 잠시 그를 쳐다봤다.
'왜 저러는 거지.'
우리는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학원에서 몇 번 마주쳐 인사를 나눈 정도가 전부였다.
"괜찮습니다."
"비가 꽤 세게 옵니다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세 번째 거절이었다. 나는 이쯤 그가 알겠다며 돌아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우산을 내 쪽으로 조금 더 기울였다. 우산 아래 그늘이 넓어지는 게 느껴졌다.
"저는 안 괜찮습니다. 옆에서 다 젖는 사람을 보고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라서."
담담한 어조였다. 마치 별거 아닌 사실을 말하듯이.
나는 그 말에 뭐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결국 한 발, 그의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우산 안으로 들어서자 빗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대신 옆에 서 있는 그의 숨소리가, 발소리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둘이 걷는 길은 조용했다.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산 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만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왜 이런 걸 신경 쓰는 걸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다 마주친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강시우는 원래 그런 성격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원칙적이고, 눈에 보이는 불합리를 그냥 넘기지 못하는 성격. 그렇다면 이것도 그저 그 성격의 연장선일 뿐일 수도 있었다.
'그래, 별다른 의미는 없을 거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도, 나는 이상하게 그의 옆얼굴을 한 번 더 쳐다봤다.
마차가 있는 곳까지 왔을 때, 나는 우산에서 벗어났다.
빗방울이 다시 어깨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온도차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고맙습니다."
"별거 아닙니다."
그는 짧게 대답하고 돌아서려 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물었다.
"왜 저한테 이렇게 신경 쓰세요?"
질문을 뱉고 나서야 내가 왜 그런 걸 물었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그냥 넘어가면 될 일이었는데.
그는 잠깐 멈췄다가 돌아봤다.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묘하게 길게 느껴졌다.
"그러게요."
그가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답이 너무 솔직해서, 나는 뭐라 반응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걸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보통이라면 적당한 이유를 붙여 넘어갔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모르겠다는 말을 마치 확정된 사실처럼 말했다.
나는 그 얼굴을 잠시 더 쳐다봤지만, 거기서 더 읽어낼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그대로 우산을 접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빗속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젖은 어깨가 조금 서늘했다. 마부가 뭐라 말을 걸었지만 제대로 듣지 못했다.
창밖을 보는데, 마차가 학원 근처 거리를 지나칠 때 눈에 들어온 장면이 있었다.
한지훈과 윤소라가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한 개의 우산 아래, 몸을 바짝 붙인 채로.
윤소라가 한지훈의 팔을 붙잡고 웃고 있었다. 한지훈도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익숙했다.
'내 아버지, 이경덕 백작이 정해준 혼약자였던 한지훈.'
육 년이었다. 정혼자로 지낸 시간이 육 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저 우산 안에, 저 자리에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그가 저렇게 우산을 씌워줬고, 나는 저렇게 그의 팔을 붙잡고 걸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기에 다른 사람이 서 있고, 나는 마차 안에서 그걸 구경하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을 창문 너머로 오래 바라봤다.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왜 이제 와서 이런 게 아픈 거지.'
'파혼한 건 이미 몇 달 전인데.'
머리로는 다 정리된 일이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다시 보니, 정리됐다고 믿었던 감정이 그렇게 완전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마차가 그들을 지나칠 때, 한지훈이 문득 이쪽을 봤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설마 알아본 건가.'
그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미안함도, 죄책감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나를 스쳐 지나가는 풍경처럼 봤다. 마치 창밖에 지나가는 다른 마차를 보듯 그런 눈빛이었다.
나는 시선을 먼저 돌렸다. 창밖이 아니라 손끝을 봤다.
손가락 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끝난 거구나.'
그 사실을, 나는 그날 처음으로 완전히 받아들였다. 서류상으로는 이미 끝난 관계였지만, 마음 어딘가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매듭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매듭이 오늘, 그 눈빛 한 번에 완전히 풀려버린 느낌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우산 하나, 붙어 있는 두 사람, 그리고 그걸 지켜본 나.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저녁을 먹으면서도, 그 장면이 자꾸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날 밤, 나는 잠들기 전까지 이상하게 강시우의 우산을 떠올렸다.
같은 비였는데, 왜 하나는 서럽고 하나는 이상하게 따뜻했는지.
'별거 아닌 친절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자꾸 생각나는 거지.'
그 답을 찾기도 전에 눈이 감겼다.
다음 날 학원에는 또 다른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