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청람국. 이곳의 정식 명칭이라고 했다. 성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유난히 맑았는데, 그게 위로가 되진 않았다. 배는 고팠고 지갑엔 한국 돈밖에 없었다. 만 원짜리 몇 장이 세상 쓸모없어지는 순간을 살아서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저기, 여기서 뭐 먹을 만한 데 있을까요?" 지나가던 상인에게 물었더니 그는 내 옷차림을 훑어보고는 대번에 표정을 지었다. 이세계 옷은 확실히 아니었으니 별종처럼 보였을 것이다. 교복 치마에 등에 멘 책가방까지, 누가 봐도 방금 소환된 애들 티가 났다.
"소환자시오? 관청 가서 등록하시게. 안 그럼 여기서 아무것도 못 사요."
"등록을 안 하면 물도 못 사요?"
"물은 파는 사람 인심이지만 빵은 인심으로 안 되지."
묘하게 논리적인 대답이었다. 배가 고프니 별걸 다 진지하게 듣게 됐다.
등록. 그 한마디가 우리를 관청 앞으로 이끌었다. 줄이 길었다. 평민으로 분류된 소환자가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세계관 자체가 소환자를 등급 나눠 받는 시스템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는 얘기다. 얼마나 자주 사람을 데려온 거야, 여기. 줄 앞쪽에 서 있는 사람들 몰골도 제각각이었다. 정장 입은 아저씨, 체육복 입은 학생, 심지어 잠옷 차림인 사람도 있었다. 소환이라는 게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작위로 벌어지는 재난이라는 뜻 같았다.
한 시간을 기다려 도착한 창구 안쪽에 앉아 있던 사람이 최정한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서른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고,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었다. 서류 산더미에 파묻혀 있는 게 딱 이 나라 공무원처럼 보였다. 책상 한 귀퉁이에는 식어버린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는데, 그마저 마실 시간도 없어 보였다.
"서은하, 박태호 씨. 확인했습니다." 그는 서류를 뒤적이며 무심하게 말했다. "평민 등급 소환자는 왕궁에서 생활 지원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마물 사냥 등록증을 발급해드립니다. 이걸로 길드에서 임무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마물 사냥이요?" 나는 되물었다. 이 세계에 마물이 있다는 것도 방금 알았다.
"이 세계에는 마물이라는 게 있습니다. 도시 외곽에 서식하며, 등급이 낮을수록 개체 수가 많고 위협도가 낮습니다." 최정한은 그렇게 설명하며 손가락으로 표를 짚었다. 표에는 하급, 중급, 상급, 재앙급까지 등급이 나뉘어 있었고 각 옆에 삽화와 보상금이 적혀 있었다. "처음이시니 최하급부터 시작하시면 됩니다. 한 마리당 보상금은 은화 두 냥 정도입니다."
"은화 두 냥이 얼마나 되는 돈인가요?"
"빵 두 덩이 값입니다."
"목숨 걸고 빵 두 덩이요?"
"최하급은 목숨 안 걸어도 됩니다. 물리면 좀 아프긴 한데."
좀 아픈 걸로 끝나면 다행이지. 나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옆에서 태호는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고 서류를 받아들었다. 이 와중에도 글자를 하나하나 꼼꼼히 읽고 있는 게, 얘는 이럴 때조차 성실하구나 싶었다.
"두 분은 숙소도 알아보셔야 합니다." 최정한이 덧붙였다. "관청 근처에 소환자 전용 여관이 있는데, 방값은 임무 수당으로 후불 결제가 가능합니다."
"후불이요? 저희가 도망가면 어떡하려고요?"
"도망가 봤자 성문 밖은 마물 밭입니다. 아무도 안 도망가요."
최소한의 인정미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후불이라니, 이 사람 은근히 배려하는구나. 알고 보니 배려가 아니라 그냥 도망칠 곳이 없어서 성립하는 시스템이었지만.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최정한은 어깨를 슬쩍 들썩였다. "성녀님, 용사님 담당하는 부서는 따로 있어서요. 저는 그냥 이쪽 담당입니다." 씁쓸한 표정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도 뭔가 억울한 게 있는 눈치였다. 동질감이 좀 느껴졌다. 같은 반에서 소환됐는데 누구는 용사고 누구는 최하급 마물 사냥이라니, 이 세계도 사람 차별하는 방식이 우리 반 등수랑 비슷한 데가 있었다.
"저기, 혹시 도현이도 여기 등록했나요? 이도현이라고, 용사로 뽑힌 애요."
"용사님은 왕궁 직속이라 여기 서류 안 옵니다. 궁금하시면 나중에 왕궁 쪽에 문의하시죠."
궁금하긴 했는데 지금 당장 갈 처지는 아니었다. 일단 빵부터 사 먹어야 했다.
여관은 낡았지만 침대가 있었고, 침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나무 계단은 밟을 때마다 삐걱거렸고, 방문에는 자물쇠도 없이 나무 걸쇠 하나가 덜렁거렸다. 방을 두 개 잡을 돈은 당연히 없어서 한 방에 침대 두 개를 넣어달라고 했다. 주인은 별 신경도 안 쓰고 방을 내줬다. 소환자들이 하도 드나드니 이런 요청도 익숙한 모양이었다.
태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 애는 뭘 해도 표정이 없구나, 새삼스레 생각했다. 짐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가방을 침대 옆에 내려놓는 손짓조차 무심했다.
"태호야." 처음으로 이름을 불러봤다. "우리 앞으로 같이 다녀야 하는 거지, 어차피?"
그는 잠깐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이 거절은 아니었다.
"이도현이랑은 친구잖아. 안 서운해? 걔는 용사 됐는데."
그 말에 태호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뭔가 있구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날은 참았다. 첫날부터 남의 상처를 캐물을 만큼 뻔뻔하지는 못했다.
"우리 저녁은 뭐 먹지." 대신 화제를 돌렸다. "빵 두 덩이 값 벌려면 마물 몇 마리 잡아야 되는 거야, 여관비랑 밥값 합치면."
태호가 손가락을 몇 개 접었다 폈다 하더니 대충 숫자를 말했다. 계산은 정확한데 표정은 여전히 없었다. 얘랑 있으면 든든하기도 하고 좀 무섭기도 하고, 감정이 참 애매하게 뒤섞였다.
"자자." 대신 그렇게 말하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등이 뻐근했다. 오늘 하루 사이에 세계가 바뀌었는데 몸은 여전히 고등학생의 몸이었다. 이게 실감이 안 나서 웃음이 나왔다. 천장 나무판 틈으로 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게 보였다. 이세계라고 해서 벌레까지 특별하게 생기진 않은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다음 날 아침, 마물 사냥 등록증을 손에 쥐고 관청을 나섰다. 최정한이 알려준 대로 성벽 서문으로 나가면 초입 사냥터가 있다고 했다. 걸어가는 길에 상점가를 지났는데, 어제와 달리 눈에 뭐가 좀 들어왔다. 대장간에서는 쇠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노점에서는 처음 보는 과일을 팔고 있었다. 사람들 옷차림도 지역마다 조금씩 달랐다. 이 세계도 나름의 질서와 생활이 있다는 게 실감 났다.
걸어가는 동안 태호가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무서우면 뒤에 있어."
짧은 말이었지만 그게 그날 그 애가 한 말 중 가장 긴 말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냥 웃었다.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니까. 솔직히 말하면 심장이 아까부터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르게 뛰고 있었다.
서문을 지나자 풀숲이 우거진 벌판이 펼쳐졌다. 저 멀리 작은 그림자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처음 보는 생물, 처음 겪는 위험. 마물 사냥이라는 게 정말로 시작되고 있었다. 문지기가 우리를 힐끗 보더니 별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창을 세워 들었다. 하루에도 몇 십 명씩 나가는 게 뻔한 모양이었다.
"저게 최하급이라는 건가요?" 나는 등록증에 그려진 삽화와 눈앞의 생물을 번갈아 봤다. 그림 속 존재는 순한 인상이었는데 실물은 어딘가 이빨이 많았다. 몸통은 토끼처럼 둥글둥글한데 입만 개구리처럼 옆으로 쭉 찢어져 있었다. 저게 최하급이면 상급은 대체 어떤 모양일까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풀을 밟는 소리에 그 생물이 이쪽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무섭다기보다는, 낯선 존재와 처음 시선을 교환한다는 것 자체가 주는 이물감이었다.
"저거 잡으면 되는 거지?" 태호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며 물었다. 무기도 없이 나뭇가지라니, 이 상황이 좀 어이없어서 웃음이 났다.
"칼도 안 주고 그냥 잡으라는 거야, 이 나라?"
"등록증 받을 때 초심자용 단검 준다고 써 있던데. 안 챙겼어?"
돌아보니 정말 등록증 뒷면에 조그맣게 적혀 있었다. 최정한, 그 양반 설명을 좀 더 꼼꼼히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결국 다시 관청까지 돌아갈 순 없어서 일단 맨손과 나뭇가지로 시작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뒤편, 풀숲 깊은 곳에서 무언가 작은 것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유독 반짝였다. 최하급 마물치고는 이상하게 강렬한 시선이었다. 다른 마물들은 우리를 신경도 안 쓰는데 그것만 유독 이쪽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크기도 다른 개체들보다 확연히 작았다.
그 순간엔 그게 뭔지 전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