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왕궁 마차를 본 다음 날, 여관에서 아침을 먹으러 나가는 길에 시녀 두 명과 마주쳤다. 서연을 모시는 시녀들이었다. 왕궁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 자체가 이미 계급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옷깃 하나까지 다림질이 잘 되어 있어서, 그 옆에 서 있는 내 후줄근한 여행복이 더 초라해 보였다.
"평민 두 분이시죠?" 시녀 하나가 물었다. 존댓말이었지만 말투 끝이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네, 맞는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성녀님께서 걱정하고 계세요. 두 분이 위험한 임무를 맡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요." 시녀가 말하며 슬쩍 웃었다. "괜한 데 나서지 마시고, 하급 임무 정도만 처리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걱정이라는 말과 표정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서연이 걱정을 했다면 그건 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체면 때문일 게 분명했다. 상급 마물을 잡은 평민이 있다는 소문이 왕궁 안에서 도는 게 서연 입장에서는 껄끄러운 일일 테니까. 삼 년 동안 봐온 얼굴이었다. 남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자기 손해만 계산하는 그 표정.
"저희는 그냥 저희 사정대로 하려고요."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대답했다. 이 정도 저항이 내 한계였다.
"사정이야 이해하지만, 성녀님 명예에 관계된 일이라서요." 다른 시녀가 끼어들었다. "평민 신분으로 상급 마물을 잡았다는 게 알려지면, 왕궁에서 소환자 판정 시스템을 의심받을 수도 있거든요."
"판정 시스템이요?" 내가 되물었다.
"소환될 때 각인되는 등급 말이에요. 성녀, 용사, 그 아래로 평민 소환자들. 그게 랜덤이 아니라 자격을 보고 정해지는 거라고 다들 알고 있잖아요." 시녀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얼굴로 설명했다. "그런데 평민이 상급 마물을 혼자 잡아버리면, 그 자격이라는 게 사실은 헛소리였다는 게 드러나는 거죠."
판정 시스템을 의심받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대강 짚이는 게 있었다. 서연은 성녀로 대접받고 나는 평민으로 밀려난 그 구분 자체가 사실 별 근거 없는 거였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갑자기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런 세계관 설계까지 부실할 줄이야. 자격이라는 게 있긴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처음 눈에 밟힌 사람한테 좋은 카드를 몰아준 건지.
"그럼 등급이라는 게 원래 별거 아니었다는 거네요."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시녀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곤란해요."
"저희가 뭘 잡든 그건 저희 생계 문제인데요." 나는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 최대한 숨겼다.
"그런 태도가 문제라는 거예요." 시녀가 표정을 굳혔다. "성녀님이 좋게 말씀하시니까 순순히 따르시라는 거죠. 안 그러면……."
말끝을 흐렸지만 그 협박의 결이 익숙했다. 서연은 항상 이런 식으로 위협했다. 직접 말하지 않고 주변 사람을 통해 압박을 넣는 방식. 삼 년 동안 겪었던 방식이 이세계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었다. 사람은 안 변한다더니, 세계를 넘어와도 안 변하는 모양이었다.
"두 분 등록증 정지시키는 거야 저희 쪽에서 어렵지 않아요." 시녀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었다. "참고만 하세요."
"등록증 정지가 그렇게 쉬운 거예요?" 나는 물었다.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라, 그 말이 진짜인지 확인해야 했다.
"성녀님 명의로 요청하면 길드 쪽에서 거절 못 해요." 시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조용히 지내시라는 거예요."
시녀들이 떠나고, 나는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등록증이 정지되면 우리는 마물 사냥도 못 하고, 생계가 통째로 끊긴다는 소리였다. 왕궁 뒷배 없이 이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게 이렇게 무력한 일이었나. 칼 한 자루 들고 마물을 썰어 넘기는 게 대단해 보여도, 결국 종이 한 장짜리 등록증이 있어야 그 짓도 할 수 있다는 게 우스웠다.
"괜찮아?" 태호가 물었다. 언제 나왔는지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안 괜찮은데, 안 괜찮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진 않으니까."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웃었다. 웃는 거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저 여자들이 뭐라고 했는데."
"등록증 정지시킬 수도 있대. 서연이 신경 쓰이나 봐. 우리가 상급 마물 잡은 거."
태호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질투도 아니고 뭐 저런 걸로."
"질투는 아닐걸. 그냥 자기 체면 문제겠지."
우리는 아침을 먹으러 가려던 걸 포기하고 여관으로 돌아갔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
그날 오후, 최정한이 급하게 우리를 찾아왔다. 표정이 심각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부터 평소보다 다급했다.
"두 분, 오늘 사냥터에 가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왕궁 쪽에서 압박이 들어왔어요. 상급 마물 건 때문에."
"압박이요?" 나는 되물었다. 아침에 들은 얘기랑 똑같은 방향이었다.
"등록증 정지까지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가 있어서요." 최정한은 목소리를 낮췄다. "제가 최대한 미루고 있는데, 오래는 못 버팁니다."
"미루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게, 정확히 얼마나 남았다는 거예요?" 나는 물었다. 숫자로 듣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될 것 같았다.
"길어야 사흘이요." 최정한이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그 안에 성녀님 귀에 다른 얘기가 들어가면, 저도 못 막아요."
최정한이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등록증 정지가 더 큰 문제였다. 밥줄이 끊긴다는데 여유롭게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당분간 조심하시라는 말밖에 못 드리겠네요." 최정한은 씁쓸하게 웃었다. "저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라서요."
"조심하라는 게, 사냥을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아니면 눈에 안 띄게 하라는 뜻이에요?" 태호가 끼어들며 물었다.
"둘 다요." 최정한이 짧게 답했다. "제일 좋은 건 안 하는 거고, 그게 안 되면 최소한 소문이 안 나게 하시라는 거예요."
"저희 밥값은 소문 안 나게 벌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최정한도 그 말에는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난 뒤, 태호와 나는 여관 방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창밖에서 마차 소리가 지나가는 게 유독 크게 들렸다. 상급 마물을 잡은 게 잘못이었나. 아니, 애초에 잡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도망칠 수도 없었고, 옆에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결과 때문에 밥줄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는 게 억울했다. 살려고 한 일이 문제가 되는 세계라니, 이 정도면 그냥 악의적으로 설계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냥 숨기고 하급만 하는 게 낫나." 나는 중얼거렸다.
"그거로는 안 돼." 태호가 답했다. "방값도 못 벌어."
맞는 말이었다. 하급 마물 사냥으로는 방값과 밥값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미 며칠 전에 계산해본 적이 있었다. 하급 마물 한 마리 값으로는 방값의 반도 안 나왔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계속 상급 마물을 잡거나, 아니면 왕궁의 압박에 굴복해 굶는 것, 둘 중 하나였다.
"굶는 거보다는 위험한 게 낫지." 내가 먼저 말했다.
"위험한 거보다는 굶는 게 나을 수도 있어." 태호가 반박했다. "죽으면 밥값이 무슨 의미가 있어."
"그럼 뭐, 둘 다 싫으면 어떻게 하는데."
"내가 잡을게." 태호가 말했다. "너는 뒤에만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계속 너한테만 미룰 수는 없잖아."
"지금은 그게 맞아." 그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너 아직 마물 하나도 제대로 못 잡잖아."
맞는 말이었지만, 그 말이 이상하게 뜨끔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끝이 괜히 차가워졌다.
"나 화내려고 한 말 아니야." 태호가 덧붙였다. 내 얼굴을 보고 뭔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 거야."
"알아. 화 안 났어." 그렇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사실이라서 더 뜨끔했던 거지,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대신." 태호가 이어 말했다. "내가 가르쳐줄게. 너도 언젠가는 혼자 해야 하니까."
"뭘 가르쳐준다는 건데."
"칼 다루는 거, 거리 재는 거, 마물 습성 보는 거. 내가 아는 거 다."
"너 그거 어디서 배웠는데."
"몸으로." 태호가 짧게 답했다. 더 묻지 말라는 뜻 같아서 나도 더 묻지 않았다.
그날 밤, 창밖으로 왕궁 쪽 불빛이 밝게 켜져 있는 게 보였다. 서연은 아마 저 어딘가에서 편하게 잠들어 있을 것이다. 비단 이불에 덮여서, 시녀들이 물 떠다 주는 방에서. 그 생각을 하니 괜히 배가 아팠다. 억울한 건지 부러운 건지도 헷갈렸다.
나는 낡은 침대에 누워 태호가 옆방에서 짐을 정리하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 애한테 의지하는 게 맞는 걸까. 이도현한테 오랫동안 이용당해온 애한테, 이제는 내가 또 다른 방식으로 기대려는 건 아닐까.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나도 태호의 칼과 몸을 방패로 쓰고 있는 거 아닌가.
옆방에서 뭔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짐 정리하다 뭘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나는 그 소리에 괜히 웃었다. 이런 순간에도 웃긴 게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으로 편하게 잠든 밤이었다는 걸, 그날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