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평민 소녀, 이젠 안 밀려

4화

상급이라는 글자를 본 순간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등록증에 적힌 설명으로는 최하급 대비 위협도 십수 배, 라고만 되어 있었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두려움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십수 배라는 표현이 얼마나 무책임한 표현인지, 그 순간 온몸으로 이해했다. 배율로 표시할 수 없다는 건 애초에 계산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고, 계산이 불가능한 상대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도망쳐." 태호가 낮게 말했다. 대답할 겨를도 없이 그 짐승이 우리 쪽으로 달려들었다. 늑대와 곰을 섞어놓은 듯한 몸체에 날카로운 발톱, 입가에서 김이 뿜어져 나왔다. 땅을 박차는 소리가 지진처럼 느껴졌고, 그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척추까지 올라왔다. 나는 넘어지듯 뒤로 몸을 던졌고 손목 위의 도마뱀은 그새 어디로 튀었는지 사라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사람 손목에서 뛰어내리다니, 참으로 눈치 빠른 도마뱀이었다. 나중에 잡히면 꼭 한 소리 해야겠다고, 그 짧은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태호가 짐승 앞을 막아섰다. 단검 하나로 무슨 승산이 있겠나 생각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도망치라고 말한 사람이 정작 도망치지 않는 게 말이 되나, 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입 밖으로 낼 틈은 없었다. 짐승의 발톱이 그를 향해 그대로 내려찍혔고, 나는 눈을 질끔 감았다. 쩌엉. 예상한 소리가 아니었다.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는데, 그건 사람이 찢기는 소리가 아니라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였다. 살이 갈라지는 소리를 기대했던 내 예상이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그 짧은 순간에 안도감보다 먼저 어이없음으로 다가왔다. 눈을 떴을 때 태호는 그대로 서 있었다. 짐승의 발톱을 맨손으로 막아낸 채였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그것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뭐야, 저거………." 나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태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다만 눈빛만 달라져 있었다. 평소의 눈빛과는 결이 달랐다. 뭐랄까, 스위치가 하나 켜진 것 같은 눈이었다. 그가 팔을 살짝 비틀었을 뿐인데 짐승의 앞발이 통째로 뒤로 튕겨 나갔다. 짐승이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저 정도 덩치가 팔 하나 비트는 힘에 튕겨 나간다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나는 다시 셈을 해보려다가 관뒀다. 셈이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 어떻게………." "그냥 이런 거야." 그는 말을 흐렸다. 짐승이 다시 일어서려는 순간 태호가 몸을 낮추고 그대로 짐승의 몸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짐승의 몸이 통째로 뒤로 밀려나며 나무 몇 그루를 부러뜨렸다. 우지끈, 하는 소리가 두 번쯤 연달아 들렸고 그 뒤로는 조용해졌다. 상급 마물이, 사람 주먹 한 방에 나무를 부러뜨릴 정도로 밀려났다. 이건 힘의 격차가 아니라 계산 오류 수준이었다. 등록증에 뜬 위협도 표시가 잘못된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니면 저놈이 사람 취급을 못 받는 등급으로 다시 분류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짐승은 완전히 정신을 잃었는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몸통이 부풀었다가 천천히 가라앉는 걸 보니 숨은 쉬고 있는 모양이었다. 태호는 손을 털며 뒤를 돌아봤다.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숨소리도 거칠지 않았다. 방금 나무를 부러뜨린 사람치고는 너무 태연한 얼굴이었다. "너 그냥 사람이었던 거 맞아?"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아버지가……." 태호는 잠시 말을 골랐다. 손등에 묻은 흙먼지를 옷자락에 닦아내면서. "그런 쪽 유전이 있었어." "그런 쪽이라니." "괴력. 태어날 때부터." "그거 왜 지금까지 숨겼어? 그동안 잡초 뽑을 때도, 짐 나를 때도 힘든 척했잖아." "숨긴 게 아니라……." 그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잠깐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 짧은 문장 뒤로 뭔가 더 있어 보였다. 어릴 때 이도현을 다치게 한 적이 있다든지, 그 이후로 힘을 숨기게 됐다든지, 눈빛에서 그런 사연이 읽혔지만 그날 그가 더 설명하지는 않았다. 나도 캐묻지 않았다. 방금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그렇게 무례할 수는 없었다. 궁금함을 억지로 삼키는 것도 나름의 예의였다. "고마워."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이 말이 얼마나 초라한지 알았지만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태호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자루를 챙기기 시작했다. 상급 마물의 시체도 팔면 값이 될 것 같았지만 그걸 어떻게 옮길지가 문제였다. 저 덩치를, 저 무게를, 무슨 수로 관청까지 끌고 가나. 마차라도 빌려야 하나 싶었는데 그럴 돈이 어디서 나오나 하는 생각이 또 따라붙었다. 결국 가죽과 발톱, 이빨 몇 개만 챙기기로 했다. 통째로 옮기는 건 다음에 사람을 사서 하자고, 그렇게 정리했다. "이거 하나만 봐도 오늘 벌이는 끝난 거지." 나는 발톱 하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손가락 두 개보다 컸다. "팔면 얼마나 받을까." "몰라. 근데 이 정도면 우리 한 달 방값은 나오지 않을까?" 태호는 대답 없이 자루를 어깨에 걸쳤다. 말이 없는 걸 보니 기대는 안 하는 눈치였다. 나 혼자 벌써부터 셈을 하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급하게 관청을 다시 찾았다. 상급 마물을 처치했다는 신고를 하러 간 거였는데, 최정한은 서류를 보다가 눈을 몇 번이나 비볐다. "상급을 두 분이서요?" 그는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거 오기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아니요, 맞아요." 나는 대답했다. 태호가 한 일이라고 굳이 밝히지는 않았다. 이 애는 그런 걸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발톱이랑 이빨 몇 개 가져왔는데, 감정해보시면 알 거예요." 나는 자루를 내려놓았다. 최정한은 자루를 열어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이거…… 진짜네." 그는 발톱 하나를 들어 등록증에 있는 도감과 대조했다. "크기도 맞고, 절단면도 신선하고요." "그러니까요." "이 정도 성과면 하급 등급 승급도 가능한데……." 최정한이 서류를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다만 이게 왕궁 쪽 귀에 들어가면 좀 골치 아플 수도 있습니다." "왕궁이요?" "평민 등급이 갑자기 상급 마물을 처치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성녀님이나 용사님 쪽에서 신경 쓰실 수도 있어서요."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괜한 시선 끌지 않으시는 게 나을 겁니다." "그게 왜 신경 쓰이는 일인가요? 저희는 그냥 마물 잡고 돈 받으면 끝인데."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서요." 최정한은 서류를 서랍에 밀어 넣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평민이 갑자기 두각을 드러내면, 원래 두각을 드러내야 할 사람들 입장에서는 좀 거슬리는 모양이더라고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보상금은 예상보다 짜게 나왔다. 최정한은 미안한 얼굴로 "위쪽에서 액수를 정한 거라 저도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등급 승급도 서류상으로만 처리됐고 실질적인 대우는 그대로였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따질 곳도 없었다. 이럴 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평민 신세가 뭔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관청을 나설 때, 왕궁 쪽에서 온 마차가 지나가는 걸 봤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마차였고, 말도 세 마리나 끄는 걸 보니 보통 신분은 아니었다. 마차 창문으로 서연의 얼굴이 살짝 보였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고, 표정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시녀 두 명이 그 옆을 따르고 있었다. 마차가 지나가면서 시녀 중 하나가 우리를 힐끗 보고는 뭔가 귓속말을 했다. 서연이 웃었다. 그 웃음이 나를 향한 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심장이 서늘해지는 느낌만은 확실했다. 마치 방금 이빨과 발톱을 팔아 얻은 그 얄팍한 만족감을, 저 마차 안에서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태호는 그 마차를 한참 쳐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나도 굳이 뭐라 묻지 않았다. 오늘 하루만으로도 이미 궁금한 게 넘쳐서, 더 얹을 자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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