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누명 씌웠으니, 후회하게 해줄게

1화

겨울이 깊어지면 대현국의 귀족들은 저마다의 벽난로 앞에서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촛불을 밝히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 불빛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밤일수록 성녀궁의 지하 별채는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 은우는 그곳에서 열두 해를 보냈다. 성녀로서 사람들 앞에 서는 낮의 시간과,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밤의 시간이 철저히 나뉘어 있던 삶이었으며, 그 밤마다 그녀는 손목에 새겨진 봉인의 문양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잠들었다. 어머니인 유서희 후작부인이 그녀가 열 두살이 되던 해에 직접 새겨 넣은 문양이었다. 성녀의 힘이 너무 강해서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은우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위험해서가 아니라, 후작가의 계산에 맞지 않을 만큼 큰 힘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예를 위한 도구. 그녀가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었다. 대현국의 성녀는 신탁을 받는 자리였고 신탁은 늘 후작가의 뜻과 정확히 일치하도록 다듬어져 나갔으며, 그 다듬는 손이 바로 은우 자신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녀의 진짜 힘은 겉으로 드러난 것의 몇 배는 되었으나, 그 힘을 온전히 드러내는 순간 후작가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리라는 걸 어머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봉인을 걸었고, 은우는 그 봉인을 제 몸의 일부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열 두살 이후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볼 때마다 그것이 팔찌인지 족쇄인지 헤아려 본 적이 없었다. 헤아려 봐야 달라질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낮, 신탁 의식이 있었다. 대전 한가운데 은우가 서고, 그 옆에 지아가 섰다. 사람들의 시선은 신탁을 받는 그녀가 아니라 지아에게로 먼저 향했다. 후작가의 또 다른 딸이자, 사교계에서 흔히 말하는 사랑스러운 존재. 지아가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자 귀족들 사이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고, 은우는 그 순간 자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신탁을 전하는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자리를 빛내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 대비를 열두 해 동안 봐 왔지만, 그날은 유독 목이 메었다. 왜 하필 그날이었는지는 그녀 자신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으나, 손끝이 떨려왔던 그 감각이 발단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인가. 언제까지 누군가의 방패이자 장식으로만 존재할 것인가. 그녀는 침대에 앉아 손목의 문양을 마주 보며 오랫동안 숨을 골랐고, 창밖으로는 눈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다. 방 안의 벽난로는 불씨조차 없었다. 후작가의 다른 방들은 모두 붉은 불빛으로 데워지고 있었으나, 이 지하 별채까지 온기가 닿는 일은 없었다. 은우는 그 사실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느낀 것이 아니라, 그저 오늘 밤엔 유난히 춥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봉인을 스스로 풀어내는 일은 봉인을 거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은우는 오래전 낡은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잘못하면 마력이 역류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경고였는데, 그 경고를 다시 떠올렸을 때 그녀는 오히려 옅게 웃었다. 죽는다 해도 이 방 안에서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열두 해를 이곳에서 죽은 사람처럼 살아왔으니, 한 번 더 죽는 것이 무슨 대수인가 싶었다. 그녀는 촛불 하나를 켜 들었다. 관습대로라면 벽난로 앞에서 밝혀야 할 촛불이었으나, 은우에게는 벽난로가 없었으므로 손바닥 위에 그것을 올려두었다. 흔들리는 촛불의 그림자가 손목의 문양 위에서 일렁였다. 그녀는 손목의 문양 위에 손끝을 얹고 낮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몸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눈을 뜨는 감각이 느껴졌으며, 그것은 오래 짓눌려 있던 것이 마침내 숨을 쉬기 시작하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손이 떨렸다. 숨이 가빠 왔다. 문양이 새겨진 자리가 불에 데인 듯 뜨거워지더니, 이내 온몸을 관통하는 서늘한 기운이 흘러들었다. 창밖의 눈이 문득 방 안으로 스며드는 듯한 환각과 함께, 은우는 자신의 몸 안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풀려나는 걸 느꼈다. 십이 년 동안 눌러왔던 힘이었다. 그것이 완전히 풀려나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이대로 사라져도 좋다는 생각과, 이제야 살아 있다는 감각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촛불이 순간 크게 흔들리다가 꺼졌다. 방 안은 오직 그녀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서늘한 빛으로만 밝혀졌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나. 은우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생각했다. 열두 살 이후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몸이 가벼워진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지자 그 자리에 낯선 무게가 새로 들어선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자신의 것이었다. 누구의 계산에도 맞춰지지 않은, 오롯이 그녀 자신의 힘이었다. 그러나 해방의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저택 대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은우는 눈을 떴다. 창밖으로 횃불을 든 병력이 정원을 가로질러 오는 모습이 보였고, 그 선두에는 후작가의 문장이 아닌 태자궁의 문장이 걸려 있었다. 이 시각에, 태자궁의 병력이 왜 이곳에. 발소리가 계단을 타고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하 별채까지 이어지는 그 좁은 계단을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밟은 적이 있었던가. 은우는 순간적으로 봉인을 다시 걸 수 없을까 생각했으나, 이미 풀려난 힘은 몸속에서 요동치고 있었고 그것을 도로 눌러 넣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창밖의 눈은 여전히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으나, 그녀의 방 안만큼은 더 이상 조용하지 않았다. 방문이 거칠게 열리고, 무장한 병사들이 밀려들었다. 은우는 미처 손목의 흔적을 감출 새도 없이 그 자리에 굳어 섰다.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의 손목으로 향하는 걸 보며,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순간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선두에 선 병사가 낮게 뭔가를 외쳤고, 그 뒤로 태자궁의 문장을 두른 자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눈이 은우의 손목에 새겨진, 이제는 빛을 잃고 갈라진 문양의 흔적에 멈춰 섰다.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은우는 채 짐작할 겨를도 없었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