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용황성의 대전은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나, 그 정갈함이 오히려 서늘한 위압감을 더했는데, 벽을 따라 늘어선 검은 대리석 기둥마다 은은한 불빛이 어려 있어 마치 수백 개의 눈이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천장까지 닿을 듯한 기둥의 높이는 인간의 건축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척도로 지어진 것처럼 보였고, 그 아래를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자연히 깨닫게 되어 있었다. 대현국의 궁궐도 화려하기로는 이름이 높았으나, 이곳의 위압감은 화려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적에서 오는 것이었다. 침묵 자체가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은우는 그 대전에 발을 들이며 처음으로 깨달았다.
병사들의 인도를 따라 대전 중앙에 이르렀을 때, 그들 중 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무릎을 꿇으라 명했다. 그 순간 은우는 문득 오기가 치솟아 허리를 곧게 세운 채로 섰다. 대현국을 떠나오던 그날의 기억이 스쳤는데, 성문 앞에 늘어선 백성들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는 것은 물론 지어낸 이야기였고, 실제로는 관리들이 그녀를 마차에 밀어 넣듯 태워 보내며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었다. 죄인이라는 이름표를 이미 대현국에서 받아 왔으니, 이곳에서마저 굴복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릎을 꿇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곳에서까지 고개를 숙인다면, 그녀에게 남은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게 되는 셈이었다.
용좌에 앉아 있던 진헌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인상이었다. 소문 속의 용황은 온몸에서 살기를 뿜어내는 괴물 같은 형상이었으나, 실제의 그는 오히려 지나치게 고요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 정적이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검은 예복을 걸친 그의 몸은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앉은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이 단정했는데, 그 단정함이 도리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인간이라면 저 자세를 저리도 오래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눈은 짙은 금빛이었는데, 그 눈이 그녀를 훑는 순간 은우는 자신의 몸속 어딘가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저것이 용의 눈이구나. 그녀는 처음으로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이번 생제는 유독 예의가 없군." 진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어조에는 화가 담겨 있지 않았으나, 그 무심함이 오히려 더 위협적이었다. 마치 벌레 한 마리의 행동을 관찰하는 듯한 말투였고, 그 안에는 분노보다 더 지독한 무관심이 배어 있었다. 대전에 늘어선 흑명국의 대신들이 일제히 은우를 향해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으나, 그녀는 무릎을 꿇지 않은 채 진헌을 마주 보았다. 시선을 피하면 그 순간 지는 것이라는 걸, 은우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생제로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예의까지 갖추라 하시면 곤란합니다." 은우가 답했다. 그 순간 대전 안이 술렁였는데, 인간이 감히 용황 앞에서 그런 말을 내뱉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들 몇몇은 헛기침을 하며 눈살을 찌푸렸고, 또 몇몇은 아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으려 했다. 진헌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나, 그의 손끝이 용좌의 팔걸이를 짧게 두드리는 것을 은우는 놓치지 않았다. 그 작은 동작 하나가 대전 전체의 공기를 팽팽하게 조이는 듯했다.
"억울하다." 진헌이 그 말을 되풀이하며 옅게 웃었는데, 그 웃음에는 조롱과 흥미가 반쪽씩 섞여 있었다. "인간들이 그 말을 참으로 좋아하지. 죄를 지어도 억울하다 하고, 배신을 해도 억울하다 하고." 그가 말끝을 흐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당신네 인간 성녀들이 늘 그렇게 말했었지."
그 말속에 담긴 냉소가 단순히 그녀 하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걸, 은우는 직감했다. 성녀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 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아졌던 것도, 그저 그녀의 착각은 아닐 것이었다. 이전에도 생제로 끌려온 성녀가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 성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은우는 묻고 싶었으나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순간 궁금함을 드러내는 것은 약점을 보이는 것과 같았다.
대신들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나서서 은우를 향해 격식을 갖춘 말을 건넸다. "생제께서는 흑명국의 관습을 아직 잘 모르시는 듯하니, 이번만은 폐하께서 관용을 베푸시리라 믿습니다." 지나치게 예의를 갖춘 그 말투가 오히려 조롱처럼 들렸는데, 은우는 그 이면에 깔린 경멸을 놓치지 않았다. 관용이라는 말은 이곳에서도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다. 대신의 눈빛은 그녀를 인간 이하의 무언가로 취급하고 있었으며, 그 시선 아래에서 은우는 자신이 흑명국에 도착한 첫날부터 이미 한 편의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진헌이 손을 들어 대신의 말을 끊었다. "관용은 내가 정한다." 그가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그 큰 키가 대전의 어둠을 가로지르듯 은우 앞으로 다가왔다. 발걸음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유난히 크게 울렸고, 그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은우의 심장은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은 인간과 다를 바 없이 단정했으나, 그 눈빛만은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눈동자 안쪽에서 무언가 일렁이는 듯한 빛이 언뜻 비쳤다가 사라졌는데, 그것이 정말 빛이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착각이었는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인간 성녀." 그가 그녀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이름이 아니라 종족과 신분으로만 불리는 것이 어색했으나, 은우는 그것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이름을 알려준다 해서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었다. 오히려 이름을 감추는 것이 지금으로선 유일하게 그녀에게 남은 패였다.
"당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정말 조약 때문만일까." 진헌이 나직이 물었다. 그 물음에 담긴 의미를 은우는 아직 알 수 없었으나, 그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 오래된 봉인의 흔적이 남아 있던 자리에 잠시 머무는 것을 보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손목의 그 흔적은 대현국에서도 아는 이가 몇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곳의 용황이,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아차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숨이 가빠 왔다. 은우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려 했으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진헌의 금빛 눈이 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그의 입가에 스치는 옅은 웃음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