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한밤중이었다. 창밖으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창틀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와 겹쳐 병사들의 창끝이 침실 바닥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울림이 방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은우는 그 박자를 세어보려 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숫자를 헤아리는 일조차 의미 없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서인후 후작이 성난 걸음으로 들어섰는데, 그의 얼굴은 분노보다 먼저 당혹으로 굳어 있었다. 후작은 방 안을 한 바퀴 훑어보며 병사들의 수를 세는 듯했고, 그러다 마침내 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후작이 딸을 향해 던진 첫말이었으나, 그 말은 딸의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딸이 일으킨 소란을 나무라는 것이었다. 은우는 그 어감의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걱정을 담아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이 순간에조차 뚜렷하게 되새겨졌다.
문득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열 살 무렵, 마차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던 날에도 후작은 딸의 상처보다 먼저 "왜 그렇게 부주의했느냐"고 물었었다. 그때도 지금도 아버지의 관심은 오직 은우가 만들어낸 결과에만 있었고, 그 결과가 후작가의 명예에 어떤 흠을 남기는가에만 있었다. 은우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매번 새삼스럽게 아팠다.
병사들 사이를 가르며 걸어 들어온 것은 태자 이현이었다. 은우의 전 혼약자이자, 정치적 계약으로 묶여 있던 관계였으나 한때는 진심을 나누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절제되어 있었고, 표정 역시 흔들림이 없었는데, 그 무표정함이 오히려 은우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의 뒤로 지아가 눈물을 훔치며 따라 들어왔는데, 그 눈물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기도 전에 지아의 손에 들린 물건이 은우의 눈에 들어왔다. 성결정이었다. 은우가 밤을 새워가며 정제해 낸 그 결정이, 어째서 지아의 손에 들려 있는가.
그 결정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는지 은우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력의 순도를 맞추기 위해 세 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고, 마지막 완성한 날에는 손끝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 결정이, 그 노력의 결과물이 지금 이 방 안에서 그녀를 겨누는 증거로 쓰이고 있었다.
"이걸 언니가 훔쳐 만들었다는 걸 알았을 때, 저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지아가 흐느끼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억지로 짜낸 듯한 떨림이 섞여 있었고, 그 떨림조차 완벽하게 계산된 것처럼 들렸다. 그러자 이현이 딱딱한 표정으로 은우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저주의 인형도 당신 방에서 나왔소. 이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은우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저주의 인형이라니. 그런 것을 만든 적도, 본 적도 없었다.
병사 하나가 손에 든 자루에서 그 인형을 꺼내 방바닥에 던졌다. 검붉은 실로 얼기설기 꿰맨 인형이 침실 바닥을 굴렀는데, 그 낡고 조악한 형체가 오히려 은우에게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저것이 정말 자신의 방에서 나왔단 말인가. 언제, 누구의 손에 의해 그것이 그곳에 놓였는가.
"그건 제가 만든 게 아닙니다." 은우가 겨우 목소리를 내어 말했으나, 그 목소리는 이미 방 안의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듯했다. 지아가 다시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언니, 왜 이렇게까지 하셨어요. 그렇게 힘드셨으면 저한테 말씀하셨어도 됐잖아요." 그 다정한 어조 속에 감춰진 칼날을, 은우는 너무나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게 영특한 거지. 은우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으나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증거는 이미 완벽하게 짜여 있었다. 도용된 성결정, 조작된 저주의 인형, 그리고 마침 그날 밤 스스로 풀어낸 봉인의 흔적까지. 봉인이라 함은 은우가 성녀로서 매일 밤 스스로의 마력을 억제하기 위해 걸어두던 것이었는데, 그것이 풀려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은 그녀가 무언가 은밀한 일을 벌였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그녀가 몰래 마력을 키워 다른 이를 저주하려 했다는 그림이 순식간에 완성되었으며, 그 그림 속에서 은우는 처음부터 죄인이었다. 명예. 그녀가 십이 년간 지켜온 유일한 것이 이 한순간에 부정당하고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묻겠습니다." 이현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정말 이 모든 걸 저지른 게 맞습니까?" 그 물음에는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답을 정해 두고 형식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을 뿐이었다. 은우는 이현의 눈을 마주 보았다. 한때 그 눈이 자신을 향해 다정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약혼식 날 그가 은우의 손을 잡으며 "당신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던 그날의 눈빛과 지금의 눈빛이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지금 그 눈은 지아를 감싸는 데에만 쓰이고 있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은우가 힘겹게 말했다. "이건 조작된 증거입니다." 그러자 서인후 후작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조작이라니! 네가 지금 감히 지아를 걸고넘어지느냐!"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딸의 항변을 들어볼 여지조차 없었다. 은우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 방 안에서 그녀의 말을 믿어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방 안을 채운 병사들의 시선, 아버지의 분노, 이현의 냉담함, 지아의 눈물. 그 모든 것이 마치 미리 짜인 각본처럼 정확한 순서로 은우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은우는 자신이 이 순간을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된 배역을 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이들은 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걸까.
결국 그녀에게 내려진 것은 성녀직 박탈과 후작가 제명, 그리고 명예 회복이라는 이름만 남은 텅 빈 목표였다. 판결을 선고하는 이현의 목소리는 낭독하듯 건조했고, 그 건조함 속에서 은우는 자신이 얼마나 철저히 버려졌는지를 실감했다. 은우는 병사들에게 끌려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지아를 돌아보았는데, 지아는 슬픔에 잠긴 얼굴 뒤로 아주 짧은 순간 입가에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을 본 사람은 은우 하나뿐이었다.
문밖으로 끌려 나가는 발걸음마다 차가운 복도의 냉기가 발끝을 파고들었으나, 은우는 그 추위보다 방금 본 지아의 웃음이 훨씬 더 선명하게 온몸에 새겨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승리를 확인하는 자의 웃음이었으며, 동시에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결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