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허당 자객, 위장 황후

1화

서은하는 벽돌 하나를 밟고 담을 넘는 훈련을 세 시간째 반복하던 중이었는데, 손끝이 갈라지고 무릎이 벌써 몇 번이나 까졌지만 이 정도는 밀정부에 들어온 지 십 년이 넘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섯 살 때부터 담과 지붕과 어둠을 배운 몸이었으니, 이제는 통증조차 익숙한 배경음처럼 흘려보낼 수 있었다. 담벼락 위에서 균형을 잡을 때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밤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가는 감각, 그런 것들이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은하는 손끝의 굳은살을 벽돌 모서리에 대고 다시 한 번 몸을 끌어올렸다. 이만하면 됐다, 오늘은 좀 더 부드러워졌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발끝이 미끄러지는 순간에는 어김없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그마저도 이제는 낯익은 일이었다. 그런데 훈련장 저편에서 부관이 다급하게 뛰어오는 모습을 본 순간, 은하는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라면 저렇게 뛰어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걸음이 흐트러지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던 사람인데, 지금은 옷자락이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달려오고 있었다. '또 무슨 사고를 쳤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부관의 얼굴이 지나치게 굳어 있어서 그것이 자신의 실수와는 다른 종류의 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은하는 담에서 뛰어내리며 무릎을 털었다. 흙먼지가 옷자락에 남았지만 그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지금 당장 오시랍니다." 부관은 그 말만 겨우 뱉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은하는 그 짧은 문장 속에서 이미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밀정부에서 열 몇 해를 보내며 배운 것 중 하나는, 급한 부름일수록 설명이 짧다는 사실이었다. 한태겸의 집무실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책상 위에 지도 대신 낯선 옷 한 벌을 펼쳐 놓고 있었는데, 은하는 그 옷이 예사롭지 않은 비단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금실로 봉황이 수놓인 소매와, 목덜미까지 이어지는 붉은 깃이 마치 무대 소품처럼 그녀의 눈앞에 놓여 있었다. 손을 대면 부서질 것 같은 옷이었다. 이런 옷을 입고 담을 넘을 수는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이 순간에도 먼저 떠오른다는 것이 스스로도 어이없었다. "오늘 밤, 황후가 되어야 한다." 한태겸의 말이 짧고 건조했으므로, 은하는 그것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기까지 삼 초 정도가 걸렸다. 방 안의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고, 은하는 자신의 숨소리가 그 정적을 깨는 것 같아서 잠시 숨을 참았다. "저는 아직 준비가……" "준비는 필요 없다. 살아남는 데는." 한태겸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말했다. 감정을 덜어내고 결과만 남긴 문장으로, 은하가 반박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은하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마치 그것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유일한 방식인 듯 낮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은하는 그 한숨 속에서 미안함 비슷한 것을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원래 예정되어 있던 후보자가 어젯밤 사라졌다는 사실을, 한태겸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은하의 손에 옷을 밀어 넣듯 안겨 주었고, 그 순간 은하는 자신이 이미 거절할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에 맞을지 모르겠구나." 한태겸이 옷의 어깨선을 눈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은하는 그 말이 걱정인지 그냥 사실 확인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는데, 어느 쪽이든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말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옷을 받아 든 손끝이 떨렸다. 비단은 차가웠고, 금실 자수는 손끝에 걸릴 만큼 도드라져 있었다. 이걸 입고 대체 무엇을 하라는 것인가. "제가 왜……" "묻지 마라. 지금은 시간이 없다." 한태겸은 그렇게 잘라 말하고는 시녀를 불러들였다. 은하는 그대로 끌려가듯 옆방으로 옮겨졌고, 몸단장이라는 것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머리를 틀어 올리는 손길, 얼굴에 무언가를 바르는 감촉, 그 모든 것이 낯설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마차가 황궁으로 향하는 동안, 은하는 창밖으로 스쳐 가는 궁성의 담벼락을 바라보며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려 했다. 밀정부 신입 공작원이 하루아침에 황제의 황후가 된다는 것이, 대체 어떤 종류의 임무인지 은하는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담은 자신이 늘 넘던 담과는 전혀 다른 높이와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저 담을 넘을 일은 이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서 이상하게 서글퍼졌다. 다만 한태겸이 마지막으로 건넨 말만은 또렷하게 귓가에 남아 있었다. "살아 있는 채로 그 자리를 지켜라. 그것만이 네 임무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은하는 마차가 궁문을 통과할 때까지도 제대로 곱씹지 못했다. 살아 있는 채로, 라는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 자리라는 것이 그렇게 위험한 자리라는 뜻인가, 아니면 단순히 격식을 차린 말버릇인가. 은하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내려다보았다. 훈련으로 굳어진 손, 담을 넘던 손, 이제는 황후의 손이 되어야 하는 손이었다. 대전의 문이 열리던 순간, 은하는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침향 냄새와 함께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붉은 계단 위, 옥좌에 앉은 사내의 존재감은 마치 화면 전체를 잡아먹는 배우처럼 압도적이어서, 은하는 자신이 지금 세트장 한가운데 잘못 걸어 들어온 조연처럼 느껴졌다. 야색 머리카락이 촛불 아래에서 검은 강물처럼 흘렀고, 황금색 눈동자는 그녀를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살갗을 벨 것 같은 날이 서 있었다. 그 눈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은하는 발끝부터 얼어붙는 것 같았고, 대전 안을 채운 신하들의 시선까지 더해져 온몸이 유리 인형이 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마왕이라는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구나.' 은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다리에 힘이 풀리지 않도록 발끝에 온 신경을 모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치맛단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그 소리마저 자신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은하는 숨을 죽였다. 이현성은 계단 아래 서 있는 여인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예정된 여인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키가 작고, 어깨가 좁고, 눈빛이 지나치게 곧아서 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그의 흥미를 끌었다. 대전의 촛불이 그녀의 옆얼굴을 비추는 방식이 낯설어서, 이현성은 잠시 눈을 가늘게 좁혔다. 십오 세에 형을 끌어내리고 옥좌에 오른 뒤로 칠 년이 지났으나,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고,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무례로 여겼다. 그런데 이 여인은, 두려움을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시선을 피하지는 않고 있었다. "이름이." 짧은 물음에 은하는 목이 메는 것을 느끼면서도, 훈련받은 대로 침착하게 고개를 들었다. "서은하입니다, 폐하." 이현성은 그 이름을 한 번 되새기듯 되풀이해 보다가, 옥좌의 팔걸이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 동작 하나에 대전 안의 모든 신하들이 숨을 죽였고, 은하는 그 정적 속에서 자신이 방금 얼마나 위험한 자리에 발을 들였는지를 뒤늦게, 그러나 뼈저리게 실감했다. 손끝에 닿는 옥좌의 목재 소리가 대전 전체에 울리는 것 같았고, 그 짧은 소리 하나로도 사람의 목숨이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을 은하는 처음으로 몸으로 느꼈다. 그가 옥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계단을 내려오는 그 짧은 순간이, 은하에게는 마치 몇 분처럼 길게 늘어지는 듯했다. 계단을 밟는 발소리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은하는 자신의 심장이 그 소리에 맞춰 뛰는 것 같았고, 이대로 시선을 피하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은 기분에 억지로 턱을 들었다. 저 남자가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침향 냄새 사이로 옅은 피 냄새가 섞여드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것이 착각인지 아닌지조차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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