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허당 자객, 위장 황후

3화

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 은하는 황후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갇혀 지내는 듯한 감각에 익숙해지려 애썼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눈 덮인 정원이 마치 세밀하게 만들어진 세트장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오히려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아침마다 시녀들이 가져다주는 죽이나 과일은 하나같이 정갈했고, 방 안의 향은 늘 은은했으며, 잠자리에 까는 이불의 감촉조차 부드러웠는데, 이 모든 것이 편안해야 할 이유였음에도 은하는 자꾸만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좋은 곳에 갇힌다고 갇힌 게 아닌 게 되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짧게 웃고 말았지만, 웃음 끝에 남는 씁쓸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태겸에게서는 짧은 서신 한 장이 왔을 뿐, 임무의 세부 지시는 여전히 감춰져 있었으므로, 은하는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놓였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서신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았지만 문장은 짧고 건조했고, 그 안에서 어떤 암시나 지시를 더 찾아내려 할수록 은하는 자신이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를 새삼 깨닫는 꼴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맞는 건가.' 그런 의문이 밤마다 그녀를 뒤척이게 했으나, 답은 어디에서도 오지 않았다. 이현성이 다시 그녀를 불러들인 것은 정전에서의 일이 있고 나서 사흘째 되는 밤이었는데, 침소가 아니라 그의 서재로 오라는 전언이 이례적이라는 것을 궁인들의 낮은 웅성거림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시녀 하나가 등불을 든 채 은하를 안내하는 내내 조심스럽게 곁눈질을 하는 것이, 마치 처음 보는 짐승을 살피는 듯한 눈빛이어서 은하는 그 시선이 불편하면서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폐하께서 서재로 부르시는 일이 흔치 않은데." 시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 한마디가, 복도를 지나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은하의 귓가에 오래 남았다. 서재의 문을 열자 나무 향과 먹 냄새가 은은하게 섞여 있었고, 이현성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서는 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방 안은 침소보다 훨씬 소박했는데, 벽을 따라 늘어선 서책들과 촛불 몇 개만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어서, 은하는 이 사내가 정치와 권력의 정점에 서 있으면서도 이런 검소한 공간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앉으시오."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명령과 배려가 동시에 섞여 있는 듯해서, 은하는 어느 쪽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서늘했고, 손끝으로 팔걸이를 짚었을 때 나뭇결의 결이 느껴져서, 은하는 그 감촉에 잠시 정신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었다. 이현성은 그제야 서류를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그 시선이 사흘 전 뜰에서와는 다르게 조금은 느슨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 사내가 죽는 것을 보고도, 왜 그런 대답을 했소." 그의 물음에는 명백한 궁금증이 섞여 있었고, 은하는 순간 이것이 자신을 시험하려는 함정인지,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 잠시 말을 골랐다.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 만큼 서재 안은 조용했고, 그 침묵 속에서 은하는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애써 표정을 다잡았다.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니까요. 냄새가 독한 건, 정말 독했으니까요." 은하는 그렇게 대답하며 스스로도 조금 어이가 없었는데,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건지 뒤늦게 걱정이 되었지만 이미 말은 뱉어진 뒤였다. '또 이런다. 아무 말이나 막 하고 나서 후회하는 거.' 그녀는 속으로 자신을 탓했지만,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현성은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가, 뜻밖에도 짧게 웃음을 흘렸는데, 그것이 은하에게는 몹시 낯설게 다가왔다. 마왕이라 불리는 사내가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더 위태로운 신호처럼 느껴졌다. '왜 웃는 거지.' 은하는 그 웃음의 의미를 헤아려보려 했지만,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 그저 자신의 손가락 끝을 내려다보며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이현성은 지금까지 자신 앞에 선 여인들이 대부분 두 가지 반응만을 보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지나치게 아부하며 비위를 맞추려 드는 쪽과, 지나치게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쪽. 전자는 늘 그의 눈치를 살피며 원하는 대답을 찾아 헤맸고, 후자는 그의 시선 한 번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말을 더듬었는데, 그런 반응들에 이미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그에게는 사실 어느 쪽도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마치 사실을 사실대로 진술하는 목격자처럼 담담하게 말했다는 것이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훈련받은 자다.' 그런 직감이 스쳤지만, 그는 그것을 굳이 내비치지 않고 서류를 다시 집어 들었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 여자는 그저 어리석을 만큼 솔직한 것뿐이다.' 두 가지 가능성 중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이현성으로 하여금 조금 더 이 여자를 지켜보고 싶게 만들었다. "그날 죽은 자는, 뒤로 다른 세력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이현성이 짐짓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을 이었으므로, 은하는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신뢰의 표시인지, 혹은 또 다른 시험인지 가늠하려 애썼다. 그의 말투는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듯 무심했지만, 그 안에 담긴 정보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고, 은하는 등줄기가 서서히 굳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왜 저에게 그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은하가 조심스레 되물었을 때, 이현성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종이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궁 안에서, 겁먹지 않고 사실을 말하는 사람이 드무니까." 그 대답은 짧았지만, 은하는 그 안에서 이상하게도 온기 비슷한 것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온기가 진심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가 자신을 정치적 도구로 삼기 위한 계산의 일부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믿어도 되는 걸까. 아니, 믿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기서.' 그녀는 그 물음에 스스로 답을 낼 수 없어서 그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현성은 그녀의 그런 반응을 곁눈으로 살피며,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지만, 그것을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 침묵이 은하에게는 대화가 끝났다는 신호로 읽혔다. 서재를 나서는 길, 은하는 복도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발을 바라보며, 저 하얀 것들이 소리 없이 쌓여 가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궁 안 어딘가에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차가운 공기가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고, 그 서늘함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해주는 것 같아서, 은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송이가 떨어지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이곳에 익숙해진다는 게,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흐릿했지만, 적어도 오늘 밤의 대화가 그녀에게 아주 작은 실마리 하나를 남긴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 온기가 오래 머물 틈도 없이, 다음 날 아침 마재상 후작이 황후궁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소식이 시녀를 통해 전해졌다. 전언을 전하는 시녀의 목소리는 낮게 떨렸고, 얼굴은 창백해져 있어서, 은하는 그 표정만으로도 이 방문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후작님께서... 벌써 문 앞에 와 계십니다." 시녀는 그 말을 하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았는데,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은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함이 사흘 전 뜰에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위협임을 직감했다. 어젯밤 서재에서 느꼈던 그 미묘한 온기가 마치 눈 위에 남은 발자국처럼 순식간에 지워지는 기분이었고, 은하는 다시 옷매를 가다듬으며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또 무슨 일이 시작되려는 걸까.' 창밖의 눈은 여전히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지만, 그 고요함이 오늘은 유난히 불안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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