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을 뜨기 전에 먼저 콧속으로 들어온 건 쑥 냄새였다.
타는 냄새가 아니라 말린 풀을 빻아놓은 듯한, 시큼하면서도 씁쓸한 향. 캡슐형 체험관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 냄새는 코끝을 찌르고 목구멍까지 넘어와, 마치 오래전부터 이 방에서 숨을 쉬어온 사람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천장을 봤다. 나무 서까래였다. 몰입형 헬멧을 쓰면 흔히 뜨는 로딩 화면, 반투명한 파란 격자무늬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 접속 부스에 들어갈 때만 해도 캐릭터 선택창에서 '무투가 - 진검수' 계열을 골랐다. 상금 오백만 원짜리 신작 체험 이벤트, '천명계'라는 이름의 초대형 VR 게임. 동생 등록금 마감이 사흘 남은 상태에서 아르바이트로도 감당이 안 되던 차에 발견한 이벤트였다. 접속 순위 상위 백 명에게 완주 상금을 준다고 했다. 그것만 보고 신청했다. 캐릭터 창에서 검을 든 근육질 남자를 고른 기억이 또렷했다. 근력 스탯을 최고치로 올리고, 무기는 대검, 스킬은 광역 베기 계열로 세팅했었다. 접속 부스에 들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확인한 문구도 기억났다. '초기화까지 남은 시간: 47초.' 그 숫자를 보며 마음속으로 셌던 것도 생각났다.
그런데 지금 내 몸을 내려다보니, 삼베로 만든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 손에는 검 대신 절구가 놓여 있었다. 손목이 가늘었다. 대검을 쥐던 캐릭터의 팔뚝과는 완전히 다른, 잔근육만 남은 마른 팔이었다.
"수습생, 뭐 하고 있나. 약재 손질 안 끝났으면 저녁 대령 못 한다."
낯선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네, 하고 있습니다."
나온 말에 나조차 놀랐다. 존댓말이 저절로 나왔다. 게임 속 NPC한테 이렇게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는데, 몸이 먼저 반응한 느낌이었다. 혀가, 목소리가, 심지어 고개를 살짝 숙이는 각도까지도 내가 결정한 게 아니었다.
일단 상태창을 열어보기로 했다. 눈앞에 손짓을 하며 '상태' '인벤토리' 같은 단어를 중얼거렸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시 시도했다. 여전히 없었다. 혹시 음성 인식이 아니라 시선 고정 방식인가 싶어 벽 한쪽을 오 초 넘게 노려봤다. 그것도 소용없었다. 손가락으로 허공에 사각형을 그려봤다. 창이 뜨긴커녕 손끝에 아무 빛도 남지 않았다.
'버그인가.'
됐다, 이런 것쯤은 흔한 일이다. 나는 손을 들어 내 뺨을 한 번 꼬집었다.
아팠다.
진짜로, 살이 눌리고 피부가 당겨지는 그 익숙한 통증이 그대로 왔다. VR 헬멧의 통각 피드백 강도를 최고로 맞춰놔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그냥 아픈 거였다. 손가락 끝에 눌린 자리가 붉게 남았다가 서서히 가라앉는 것까지, 실시간으로 눈에 보였다. 렌더링 딜레이 같은 것도 없었다.
'설마.'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나무 기둥, 흙벽, 창호지를 붙인 창문.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후 즈음인 것 같았다. 방 안에는 약탕기와 절구, 말린 약초 다발이 걸려 있었다. 어딜 봐도 저해상도 텍스처가 아니었다. 나뭇결 하나하나가 진짜였다. 손끝으로 기둥을 슬쩍 긁어봤다. 나무 껍질 조각이 손톱 밑에 끼었다. 그 감각이, 손톱 밑이 따끔거리는 그 미세한 통증이 너무 구체적이었다. 나는 손톱 밑을 들여다보며 한참 그대로 서 있었다.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렸다.
"이도진 수습생, 손 놀리는 게 왜 이렇게 느려. 관장님 오시기 전에 마쳐야지."
'이도진.'
내 이름이었다. 캐릭터 이름이 아니라 진짜 내 이름. 게임에서 캐릭터를 만들 때 닉네임을 '진검수'라고 지었지, 내 본명을 넣은 적이 없었다. 개인정보 동의서에도 실명을 기입하긴 했지만, 캐릭터 호출용으로는 절대 쓰이지 않는다는 안내문을 분명히 봤다. 그런데 이 세계 안의 누군가가 내 본명을, 그것도 정확한 발음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확신이 들었다. 등록 오류, 시스템 버그, 뭐라 불러도 좋을 그 실수가 나를 완전히 다른 자리에 던져놓은 거였다. 전투 직업으로 신청했던 내가, 존재조차 몰랐던 '의료 수습생' 신분으로 이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상금은 무슨, 지금 당장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지가 더 급했다.
일단 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벽을 더듬어 헬멧 벗는 동작, 로그아웃 버튼을 누르는 동작을 흉내 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관자놀이 근처를 문질러봤다. 헬멧의 스트랩이나 버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살과 머리카락뿐이었다.
괜찮다.
괜찮을 리가 없는데도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어차피 게임은 시간이 지나면 강제 로그아웃되는 시스템이 있을 거고, 그때까지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회피는 익숙했다. 대학 등록금 고지서를 받았을 때도, 아버지 병원비 청구서를 받았을 때도 나는 늘 '조금만 버티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렇게 버티다 결국 아르바이트를 세 개나 뛰게 됐지만, 그 사실은 지금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거기, 뭐 하나?"
낮고 걸걸한 목소리가 방문 앞에서 들렸다. 나는 그제야 절구를 붙잡고 약재를 빻는 척을 시작했다. 손목에 힘을 주자 절구공이가 생각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근력 스탯이고 뭐고, 이 몸은 그냥 마른 몸이었다.
끼익. 끼이익.
낡은 나무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두꺼운 무명 저고리를 입은 중년 남자였다. 눈매가 날카롭고 손가락이 유난히 굵었다. 뭔가 다급한 표정이었다. 저고리 소매 끝이 약재 물이 든 것처럼 누렇게 얼룩져 있었다.
"이 수습생, 안색이 왜 그래. 어디 아픈가?"
"아, 아닙니다."
나는 급히 표정을 가라앉혔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요란했다. '아니 이 세계관에서 내가 진짜 실존한다면, 여기서 다치면 진짜 아프고, 여기서 죽으면 진짜 죽는 거 아닌가.' 그 생각이 뒤늦게 들이닥쳤다. 게임 이벤트 상금 오백만 원 벌자고 신청했다가 진짜로 이승을 뜨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까지 이어지자 손끝이 저절로 절구를 더 세게 붙잡았다.
남자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혀를 찼다.
"손이 느려. 이래서 정식 학도가 될 수 있겠나. 서씨 의당 청림촌 분점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정신을 놓고 있어."
서씨 의당. 청림촌 분점.
그 단어들이 머릿속에 박혔다. 마치 내가 이미 알고 있어야 하는 정보인 것처럼, 몸이 먼저 반응했다. 손끝이 저절로 절구의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절구를 쥔 자세도, 약재 빻는 리듬도, 생각하기 전에 손이 알고 있었다. 내 안에 이도진이라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 몸의 기억 일부를 흡수한 걸까. 알 수 없었다.
"이 약재는 서방댁 어르신 기침약에 들어갈 거니까, 곱게 빻아야 해. 굵으면 달일 때 다 안 풀려. 몇 번을 말해줘야 알아듣나."
남자의 말투에는 짜증과 걱정이 반쯤씩 섞여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절구공이를 더 촘촘하게 돌렸다. 어깨가 뻐근했다. 이런 노동을 해본 적 없는 팔이 이런 노동을 익숙하게 해내고 있다는 게, 소름 끼치면서도 신기했다.
"정신 차리고 마무리해. 오늘 저녁 약재는 늦으면 안 되는 거 알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또 그 존댓말이었다. 이번에는 저항 없이 그냥 나왔다.
남자가 나가고 나서야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창밖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닭이었다. 화면 최적화를 위해 삭제됐어야 할 배경음이 이렇게 생생하게 들릴 리 없었다. 게다가 저 멀리서 개 짖는 소리, 누군가 장작 패는 도끼 소리, 아이 우는 소리까지 겹쳐서 들려왔다. 이 정도 배경 사운드를 다 구현하려면 서버 하나로는 부족할 텐데.
나는 절구를 내려놓고 손을 들어 내 얼굴을 다시 만졌다. 익숙한 코, 익숙한 눈두덩이. 그런데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은 처음 보는 자리였다. 손가락 마디마다 잡힌 굳은살, 손톱 밑에 낀 약재 가루, 손등에 남은 작은 화상 자국까지. 이 몸은 확실히 뭔가를 오래 해온 손이었다. 최소 몇 년은 이 절구를, 이 약탕기를 붙잡고 살아온 손.
'일단 상황부터 파악하자.'
나는 절구를 붙잡은 채로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게임인지, 현실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만약 진짜라면, 나는 지금 원래의 몸을 어딘가에 남겨두고 온 건가. 병원 침대처럼, 접속 부스 안 캡슐 안에 누워 있는 껍데기만 남긴 채로.
대답은 없었다. 다만 창밖으로 지는 해가 붉은빛으로 방 안을 물들이고 있었고, 그 빛이 너무 따뜻해서, 조금 무서웠다. 진짜 노을이었다. 그래픽으로 흉내 낸 노을은 이렇게 눈이 시리도록 붉지 않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정말 강제 로그아웃이 될 거라고, 나는 여전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방 한구석에 쌓인 약재 자루를 흘끔거리며, 밖에서 사람들 오가는 발소리와 말소리를 하나하나 세어보며, 나는 계속 그 순간을 기다렸다. 눈앞이 파란 격자무늬로 흔들리는 순간, 익숙한 소독약 냄새가 돌아오는 순간. 그런 건 오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결국 자리에 눕지도 못하고 새벽까지 그 낡은 방 안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창호지 너머로 별빛이 흐릿하게 스며들었다. 이 세계의 달은 내가 알던 달보다 조금 더 컸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나는 처음으로 이게 정말 게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정면으로 인정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