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청년은 인간이 아니었다

1화

흙냄새가 났다. 비 온 뒤의 산길, 젖은 낙엽을 밟는 냄새. 그 위로 향 냄새가 섞여 들었다. 산신각에서 타다 남은 향, 아직 연기가 다 가시지 않은 그 냄새. 이 냄새를 맡으면 항상 같은 장면이 떠오른다. 아빠는 매주 토요일마다 이 산을 올랐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상관없었다. 감기로 콜록거리면서도 등산화를 신었다.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 일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그랬다. "아빠, 오늘도 가?" "가야지. 안 가면 뭐 하나 잊어버릴 것 같아서." 그 말이 뭘 뜻하는 건지 그때는 몰랐다.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아빠는 산신각 앞에서 향을 피우고,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옆에 서서 발끝으로 흙바닥을 툭툭 건드리며 기다렸다. 뭘 비는 건지 물어본 적도 있었는데, 아빠는 웃기만 했다. "별거 없어. 그냥 무사하게 해달라고." 누구를 위한 무사함인지는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아빠가 떠난 뒤에도 나는 혼자 그 걸음을 이어갔다. 산신각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별다른 말도 없이 서 있다가 내려오는 게 전부였지만, 그게 아빠와 나 사이에 남은 유일한 약속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게 볼지도 모른다. 죽은 사람이랑 무슨 약속이 남아있냐고. 근데 나는 안다. 이 산길을 오르는 동안만큼은 아빠가 아직 앞서서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걸. 오늘도 그랬다. 검도부 훈련이 늦게 끝나서 해가 벌써 붉게 기울어 있었다. 관장님이 오늘따라 유난히 기본기를 오래 시켰다. 손목이 얼얼했다. 죽도를 어깨에 걸치고 산길을 올랐다. 다리는 무겁고 어깨는 뻐근했지만, 안 가면 뭔가 잊어버릴 것 같았다. 가는 길에 스마트폰을 봤다. 배터리가 12퍼센트였다. 저녁도 못 먹었는데 이 산을 오르고 있는 내가 좀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애들은 이 시간에 학원 가거나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 먹고 있을 텐데, 나는 뭘 하고 있나. 그래도 발은 멈추지 않았다. 습관이란 게 그런 거다. 머리로 이해가 안 돼도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산신각 돌계단이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계단 위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처음엔 등산객인가 싶었다. 근데 등산객이 이 시간에, 이런 옷차림으로 여기 있을 리가 없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실루엣, 다리를 아무렇게나 벌리고 앉은 자세. 가까워질수록 형체가 또렷해졌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옆 반에 있는 애들, 소문으로만 듣던 애들. 누구 삥 뜯었다는 얘기, 누구랑 싸워서 정학 먹었다는 얘기. 학교에서는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는데, 여기서 보니 반갑지 않았다. 하필 여기서, 하필 오늘. "어? 검도부." 한 명이 먼저 알아봤다. 담배 냄새가 확 풍겼다. 필터까지 태운 것 같은 냄새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눈도 안 마주치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마치 산에 볼일이 있어서 그냥 지나가는 것처럼. 속으로는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둘이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죽도 하나 걸치고 있으면 애들이 좀 겁먹을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야, 잠깐만." 손목이 잡혔다. 손이 생각보다 세게 조여왔다. 뿌리치려 했는데 반대로 몸이 딸려갔다. 순간 내 발이 돌계단 이끼를 밟고 미끄러졌던 것 같다. 그때부터는 기억이 뭉텅뭉텅 잘려 나갔다. 죽도를 놓쳤던 것 같고,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아당겼던 것 같고, 돌계단 모서리에 무릎이 찍히는 소리가 났던 것 같다. 딱.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몸 어딘가에서 열기가 확 올라왔다가 순식간에 식었다. 통증이 늦게 도착했다. 무릎보다 먼저 머리가 흔들렸다. "이런 데서 혼자 뭐 하냐, 응?"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부서졌다. 두 명이었는데 어느새 셋, 넷으로 늘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눈앞이 흔들려서 그런 거였다. 시야가 마치 물속에서 보는 것처럼 일렁였다. 웃음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오는데 정작 누가 웃는 건지는 구분이 안 갔다. 코에서 뜨뜻한 게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닦으니 붉었다. 내 코피였다. 그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검도부 3년 한 게 이럴 때 쓰라고 배운 건 아니었는데, 죽도를 놓친 순간부터 몸이 그냥 굳어버렸다. 배운 건 다 어디로 갔는지. 자세, 거리, 타이밍, 그런 거 다 생각도 안 났다. 그냥 얻어맞고 끌려다니는 게 전부였다. 아빠가 자주 하던 말이 있었다. "진짜 무서운 건 칼이 아니라, 칼을 든 손이 흔들리는 거야." 지금 내 손이 그랬다. 흔들리는 게 아니라 아예 멈춰버렸다. 손끝이 저려서 감각이 없었다. 주먹을 쥐어보려 해도 손가락이 말을 안 들었다. 뒤통수가 돌계단 모서리를 향해 기울었다. 숨이 가빠졌다. 시야 가장자리가 어둠으로 잠식되어갔다. 마치 화면 테두리부터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처럼, 세상이 조금씩 좁아졌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웃기게도 그 순간 떠오른 건 산신각 향냄새였다. 아빠가 여기서 늘 하던 그 자세,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던 뒷모습. 무사하게 해달라고. 그런데 그 순간, 바람이 이상했다. 쐐애액.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사람 목소리처럼 들렸다. 아니, 목소리가 바람 속에 섞여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낮고, 길게 끄는, 사람의 발음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소리. 누군가 나를 붙잡던 손이 갑자기 사라졌다. 동시에 두 사람의 비명 소리가 났다. 뭔가에 세게 부딪힌 듯한, 둔탁한 소리. 퍽. 퍽. 이어서 뭔가가 바닥을 긁는 소리,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침묵. 눈을 뜨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버거웠다. 마지막으로 본 건, 산신각 지붕 위로 떠오른 것 같은 하얀 그림자였다. 사람의 형체였는데, 사람 같지 않았다. 윤곽이 흐릿하게 흔들렸고, 그 위로 달빛인지 뭔지 모를 빛이 비쳐 들어와 실루엣만 겨우 구분됐다. 그리고 세상이 완전히 까맣게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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