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공작가의 대리 신부

2화

아침부터 어머니가 방문을 두드리며 잔소리를 쏟아냈다. "아직도 자고 있으면 어떡해, 손님이 오시는 날인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어쩐지 곱지 않았다. 노크라기보다는 두드려 패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눈만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손님이라는 건 공작가에서 보낸 사자였다. 지참금 관련 서류와 혼례 절차를 상의하러 온다고 했다. 몇 시나 됐을까. 창밖을 보니 해가 벌써 중천에 가까웠다. 늦잠까진 아닌데, 이 집에서는 이 정도만 자도 늦잠 취급이었다. "일어났어요, 어머니."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몸은 여전히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잠깐만, 딱 오 분만. 결국 오 분도 못 채우고 어머니의 두 번째 노크에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이 집에서는 늦잠 한 번 자는 것도 죄가 되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식탁에 앉으니 이지안은 벌써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수프를 뜨는 손끝이 나른했다. 어젯밤의 그 이상한 낌새는, 아침이 되니 또 아무렇지도 않게 지워져 있었다. 원래 저런 애니까. 나도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언니, 잘 잤어?" "그럭저럭." "오늘 사자 온다며. 나도 구경해도 돼?" "구경할 거 없어. 그냥 서류에 도장 찍는 자리야." 이지안은 시시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그 표정마저도 평소와 다르지 않아서, 나는 아침의 그 어색함을 완전히 잊기로 했다. "서아, 오늘 사자가 오면 예의 바르게 굴어야 한다. 알아들었어?"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늘 저런 말투였다. 명령이 아니라 경고처럼. 저러다 이라도 갈아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이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네, 알겠어요." 네, 좋아요. 알겠어요. 나는 늘 이런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 뒤에 붙는 속마음은 언제나 다른 얘기였다. 어차피 몇 달 뒤면 이 집에서 나갈 사람인데, 예의고 뭐고 신경 쓸 이유가 뭐가 있어. 도장 한 번 잘못 찍었다고 해서 이 결혼이 깨질 것도 아니고. 그래도 몸에 밴 습관은 어쩔 수 없어서, 나는 결국 예의 바르게 웃으며 사자를 맞았다. 사자는 나이 든 집사였다. 흰머리가 성성했고, 서류 뭉치를 옆구리에 낀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들어왔다. 인사도 격식에 맞춰 정확히 삼십 도쯤 숙이는, 딱 봐도 오래 일한 사람의 태였다. 집사는 응접실 탁자 위에 서류를 펼치며 지참금 절차와 혼례 날짜를 설명했다.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고, 문장 끝마다 쉬는 자리가 정확했다. 이런 사람이 뒤에서 실수를 저지를 확률은 낮겠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혼례는 원래 두 달 후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공작님께서 조금 앞당기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셨습니다." 앞당긴다고? "얼마나요?" "보름 정도입니다." 보름. 그렇게 급할 이유가 있나. 나는 잠시 의아했지만, 곧 다른 이유를 떠올렸다. 아마 지참금이 하루라도 빨리 이 집으로 넘어와야, 이지안의 위자료 문제가 조용히 해결될 수 있으니까. 공작이 재촉할 이유는 그거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환해졌다. 눈가에 잔뜩 잡힌 주름마저 밝아 보일 정도였다. "그럼 그렇게 하죠. 우리 딸도 준비할 시간은 충분할 거예요." 딸이 아니라 나였다. 준비하는 사람은 나였다. 하지만 저 사람 입에서 나온 '우리 딸'이라는 말은,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이 결혼이 만들어낼 돈을 위한 축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딱히 서운하지 않았다. 놀랍지도 않았고. 집사가 서류에 도장을 받고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나는 창밖으로 마차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 마차를 타고 얼마 안 가면 공작가 저택에 닿을 것이고, 나는 그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낯선 곳, 낯선 얼굴.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집사가 돌아간 뒤, 나는 곧바로 저택 살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원래의 이서아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전생에서 몇십 년을 살림만 했던 사람이다. 장부를 보는 눈이 있었고, 창고를 정리하는 손이 있었다. 곡물 창고에 들어가 자루 수를 세고, 부엌 장부에 적힌 지출을 훑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하녀들이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볼 정도였다. "아가씨,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고 계세요?" "살다 보면 알게 돼." 대충 그렇게 넘겼다. 사실을 말할 수는 없으니까. 이서아로 살아온 세월이 아니라, 전생의 몇십 년이 이 손끝에 남아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 오후, 이지안이 내 방에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아무것도 아닌 척, 자기 옷장 정리를 도와달라며 나를 끌고 갔다. 옷장 문을 열자 온갖 리본과 레이스가 뒤엉켜 쏟아질 듯 쌓여 있었다. 정리라기보다 재난 현장이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옷가지를 하나씩 분류하기 시작했다. "언니, 결혼식 때 나도 가도 되지?" "당연히 가야지, 네 언니 결혼식인데." "그치, 그치." 이지안은 씩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딘가 묘하게 걸렸다. 대체 뭐지, 저 웃음은. 딱히 나쁜 뜻이 담긴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손끝으로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웃는 모양이 지나치게 태연했다. 나는 애써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지안은 원래 저런 애니까, 저 애가 이상한 짓을 벌인다고 해서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옷 정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그 웃음을 몇 번이나 되짚었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고, 나는 공작가에서 보내온 예복을 입어보게 되었다. 은실로 자수를 놓은 새하얀 드레스였는데, 손끝으로 만져보니 옷감이 부드럽고 서늘한 느낌이었다. 소매 끝단에 새겨진 문양은 공작가의 상징인 듯, 세밀하게 짜여 있었다. 다이앤이 뒤에서 옷을 매만지며 감탄했다. "정말 아름다워요, 아가씨." "그래?" "네, 이렇게 잘 어울리는 분은 처음 봐요." 다이앤은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그 말이 조금 낯설게 느껴져서 나는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낯선 얼굴이었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낯선 얼굴. 하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제법 그럴듯해서, 나는 잠시 그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얼굴로, 나는 곧 공작의 부인이 될 것이다. 그 사실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설렜다. 초상화 속 남자, 그 조용한 눈매를 실제로 마주할 날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상상 속에서 몇 번이나 그려본 얼굴이었다.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 조용한 그 눈매가 나를 향할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우연히 부엌 근처를 지나다가 어머니와 이지안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물을 마시러 내려가던 길이었다. 부엌 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발걸음을 죽였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문틈으로 새어 나온 몇 마디는 분명했다. "그러니까 서아가 신방에 들어가고 나면……"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갑자기 크게 뛰기 시작했다. 뒷말은 벽 너머로 흩어져 잘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내 이름이 들렸고, 신방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이지안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는데, 톤이 낮고 조용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벽에 등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발소리를 죽이고 한 걸음, 두 걸음 더 다가갔지만 그 이상은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짧게 이어졌다가, 곧 그마저도 잦아들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