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다음 날 아침, 나는 여느 때처럼 새벽부터 일어나 창고 재고를 점검했다.
새벽 다섯 시, 아직 하늘이 완전히 밝지 않은 시각이었다.
나는 등불을 챙겨 들고 창고로 향했다.
문을 열자 곡식 냄새와 습한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곡식 스물세 가마 중 두 가마가 습기로 상해 있었다.
가마를 손으로 눌러보니 겉면이 눅눅했고, 안쪽에서는 곡식 특유의 쉰내가 올라왔다.
'이 두 가마는 못 쓴다.'
'한 가마당 값이 은화 열두 냥이니, 이번 달에만 스물네 냥 손실이다.'
나는 속으로 계산을 하며 장부를 펼쳤다.
장부에 손실 항목을 적어 넣던 중, 지유가 창고 앞에 나타났다.
"여기서 뭐 해?"
지유가 물었다.
어제와 달리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나는 붓을 든 손을 멈추고 지유를 돌아보았다.
지유는 어제 입었던 옷과 다른, 옅은 옥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아직 다 매지 못한 채 반쯤 풀려 있었다.
아침부터 이곳까지 걸어온 모양이었다.
"재고 확인. 매달 하는 일이야."
내가 대답했다.
지유는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낡은 마차가 여전히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지유의 시선이 그 마차에 멈췄다.
"저거 아직도 있네."
지유가 중얼거렸다.
무언가 떠오른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표정에 조금 희망을 느꼈다.
붓 끝에서 먹물이 한 방울 떨어졌지만, 나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기억나?"
내가 물었다.
지유는 대답 대신 마차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경첩이 삐걱, 낮은 소리를 냈다.
안은 그때와 똑같았다.
낡은 담요, 촛농 자국이 남은 나무 상자, 우리가 새겨 넣은 작은 글자들.
담요 위에는 그새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다.
나무 상자 모서리에는 여전히 굳은 촛농 자국이 그대로였다.
지유는 상자 위에 앉았다.
나도 조심스레 맞은편에 앉았다.
마차 안은 좁아서 무릎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였다.
10년 전, 5월.
외숙모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밤이었다.
지유와 나는 이 마차 안에서 촛불 하나를 켜놓고 앉아 있었다.
그날 밤은 비가 내려서 마차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소하야, 너는 가끔 이상한 말을 해."
지유가 그때 말했다.
"이상한 말이 뭔데?"
내가 물었다.
"어제도 그랬잖아. '이건 야근 수당 계산법이야' 라고. 그게 뭐야?"
지유가 물었다.
나는 순간 말을 삼켰다.
그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기억들이 있었다.
형광등이 켜진 사무실, 컴퓨터 화면, 회의 자료, 야근이라는 단어.
일곱 살 때 갑자기 밀려든 기억이었다.
어머니가 죽던 그해, 열이 심하게 나던 밤에 처음 떠올랐다.
나는 전생에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회사원으로 살았고, 과로로 죽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때 나는 서른두 살이었다.'
'월급은 이백만 원이 조금 넘었고, 야근을 하면 시간당 만 원씩 더 받았다.'
'그런 기억들이 왜 일곱 살짜리 머릿속에 있는지,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말해도 안 믿을 거야."
내가 말했다.
"믿어. 나한테는 다 말해도 돼."
지유가 말했다.
그 눈빛이 진심처럼 보였다.
나는 결국 말하기로 했다.
"나는... 원래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어. 거기서는 사람들이 매일 사무실에 나가서 서류 일을 했어. 나도 그랬고, 너무 많이 일해서 죽었어. 그러고 나서 여기서 다시 태어난 것 같아."
나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지유는 한참 침묵했다.
나는 그 침묵이 무서웠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지유의 얼굴에 그림자가 오갔다.
"그래서 네가 그렇게 계산을 잘하는 거야?"
지유가 물었다.
웃음이 조금 섞인 목소리였다.
"어... 어. 그런 것 같아."
내가 대답했다.
"신기하다. 그럼 너는 나보다 훨씬 어른이었네."
지유가 말했다.
그날 지유는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지유의 손은 작고 따뜻했다.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지유가 말했다.
나는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안전했던 순간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날 이후로 나는 지유 앞에서만큼은 계산을 숨기지 않았다.
장부를 적을 때도, 물건 값을 셀 때도, 지유는 신기하다는 듯 옆에서 지켜보곤 했다.
창고 안, 낡은 마차 안에서 나는 그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지유는 여전히 상자 위에 앉아 있었다.
"뭘 그렇게 봐?"
지유가 물었다.
나는 그 순간 물어보고 싶었다.
그날의 비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물어봐도 될까.'
'혹시 물어봤다가 지유가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지유야, 너 예전에 나한테 들은 얘기 기억나?"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유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무슨 얘기?"
지유가 되물었다.
그 반응이 진짜로 모르는 사람의 것인지, 모르는 척하는 사람의 것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지유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지만, 그것이 당황함인지 기억을 더듬는 신호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입을 열려고 했다.
마차 밖에서 하인의 발소리가 들렸다.
"강지유 님, 백작님께서 찾으십니다."
하인이 외쳤다.
지유는 서둘러 일어나 마차 밖으로 나갔다.
치맛자락이 마차 문틀에 스치며 바스락 소리를 냈다.
나는 혼자 마차 안에 남아 촛농 자국을 오래 바라보았다.
굳은 촛농 위로 손끝을 올려보았다.
10년이 지났는데도 그 촛농은 여전히 딱딱했다.
'지유는 정말 기억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예의상 부드럽게 대해주는 걸까.'
나는 그 답을 알 수 없어서, 마차 문이 닫힌 뒤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