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서재의 문을 열었을 때, 이태준 백작은 창가에 서 있었다.
등을 지고 서 있는 그 뒷모습이 낯설었다. 평소라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곧장 몸을 돌렸을 사람이었다.
그의 손에는 봉인이 뜯긴 서신이 들려 있었다.
인장은 붉은 사자, 한씨 공작가의 문양이었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저 붉은 인장을 이 저택에서 본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안, 왔구나."
백작이 뒤돌았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이태준 백작은 영지의 하층민을 위해 약초원을 넓히고 세금을 낮추는, 이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귀족이었다.
그는 늘 웃는 낯으로 사람을 대했다. 아랫사람에게도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이런 표정이 걸리는 건 처음 보았다.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눈빛은 서신을 든 손끝만큼이나 흔들리고 있었다.
서재 안에는 이미 박덕수와 이서린이 앉아 있었다.
박덕수는 백작가의 오랜 집사였다. 나에게 이 집안의 예법과 살림을 가르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보는 척했지만, 시선이 자꾸 서신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서린의 눈이 나를 향했다.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 안의 무언가가 미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열 살, 이 저택의 유일한 영애.
은빛에 가까운 옅은 금발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고, 짙은 청록색 눈동자가 항상 사람을 관찰하듯 응시했다.
말이 적은 아이였다. 하지만 나에게만은 가끔 먼저 말을 걸었다.
"한씨 공작가에서 혼약을 제안했다."
백작이 말했다.
"공작가 삼남, 한도현과 서린이의 혼약이다."
순간, 방 안의 촛불이 흔들렸다.
바람 한 점 없는 방이었다.
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챌 여유가 없었다.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웅, 하는 낮은 울림이었다.
심장이 갑자기 무겁게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혼약이라니.'
'이서린이, 저 조그마한 애가 벌써?'
생각이 뒤엉켰다.
한씨 공작가. 이 왕국에서 가장 강한 세력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집안의 셋째 아들과 혼약이라니. 그건 보호가 아니라 거래였다.
전생에서도 나는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다.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후배가 무리한 야근 끝에 쓰러졌을 때, 나는 도와줄 힘이 없었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수고했다고, 조금만 더 버티라고, 그런 말들을 아무 생각 없이 뱉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 후배는 그 뒤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장례식장 조명이 유난히 밝았던 것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지키지 못한다는 감각.
그것이 지금 이 순간, 다시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탁, 소리가 났다.
책상 위 잉크병이 저절로 넘어져 있었다.
검은 잉크가 서서히 책상 가장자리로 흘러내렸다.
"……이안?"
이서린이 나를 불렀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방 안의 촛불 세 개가 모두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심지 끝의 불씨가 파르르 떠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내 능력이었다.
감정이 격해지면, 주변의 사물이 반응했다.
사 년 전 처음 이 힘을 알았을 때는 무서웠다.
이유도 모르고 그릇이 깨지고, 창문이 흔들렸다. 어느 날은 잠결에 방문 손잡이가 저절로 덜컹거려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억누르는 법을 배웠지만,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다.
특히 지금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감정이 확 치솟을 때는.
"괜찮으냐?"
박덕수가 나를 살폈다.
목소리에 놀란 기색이 섞여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 놀람이 얕았다.
"……네.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손끝에 남은 떨림을 감추려 옷자락을 슬쩍 움켜쥐었다.
이서린은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무언가가 담겨 있었지만, 나는 읽어낼 수 없었다.
걱정인지, 의아함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한도현은 아직 열두 살이다."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정식 혼약은 서린이가 열다섯이 될 때 치러질 것이고, 그전까지는 서로 왕래하며 지낼 예정이다."
"거절할 수 있습니까?"
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스스로도 놀랐다.
집사 견습이 감히 백작가의 혼약 문제에 끼어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방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촛불이 꺼진 방 안에는 창밖의 달빛만이 스며들고 있었다.
백작이 나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질책보다는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쉽지 않다."
그가 낮게 대답했다.
"한씨 공작가는 지금 왕국에서 가장 강한 세력이다. 거절은 곧 적으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해."
"그럼 받아들이신다는 겁니까."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백작이 서신을 접었다.
접히는 종이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다만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지."
박덕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지나치며 나를 한 번 더 쳐다봤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서도 귀에서는 아까 그 웅, 하는 울림이 계속 맴돌았다.
창밖의 달빛 아래, 방 안의 촛불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억누를 생각도 못 했다.
'왜 하필 지금이야.'
'왜 하필, 저 애야.'
생각을 정리할수록 한 가지 사실이 선명해졌다.
박덕수의 표정이, 처음부터 너무 담담했다는 것.
놀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당황하거나 되묻지도 않았다. 서신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저 팔짱을 낀 채 창밖만 보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였을까.
이 혼약 이야기가 나온 게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면, 대체 얼마나 전부터 이 저택 안에서 조용히 오갔던 이야기였을까.
그리고 그걸 나만 몰랐던 걸까.
촛불의 그림자가 벽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림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이서린의 무표정한 얼굴이, 자꾸만 그 그림자 위에 겹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