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왕궁의 정원은 저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하얀 대리석 길이 미로처럼 이어졌다.
잘 다듬어진 장미 덤불이 사람 키만큼 자라 있었다.
그 사이사이 시종들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저택의 정원사가 가꾼 화단과는 격이 달랐다. 이곳의 꽃은 단 한 송이도 시들지 않았고, 흙 한 점 밖으로 튀어나온 게 없었다. 완벽함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지헌 왕자의 열 살 생일 다과회는 그야말로 사교계의 축소판이었다.
각 가문의 견습 귀족들이 부모나 후견인, 그리고 시종들과 함께 모여 있었다.
말소리는 낮았고, 웃음은 정제되어 있었다. 누구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서열과 계산이 소리 없이 오갔다.
나는 이서린의 뒤편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견습 집사는 원래 이런 자리에 낄 수 없다.
가온 백작가의 견습 집사라는 신분은, 이런 왕실 행사에서는 그림자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시종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취급을 받는 게 견습이었다.
하지만 이서린이 직접 요청했다.
"이안도 데려가겠어요."
그 한마디로 나는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의아함과 무시가 섞인 눈빛이었다. 아가씨가 굳이 견습 집사를 데려온 이유를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낯선 세계였다.
전생에서도 이런 자리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회사 워크숍이나 거래처 접대 자리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 공기 중에 흘렀다. 그때는 술과 명함, 실적으로 서열이 정해졌다. 여기서는 가문의 이름과 혈통, 그리고 어릴 때부터 배워온 예법이 전부였다.
웃음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날카로운 계산이 숨어 있었다.
누구네 집 아들이 누구네 집 딸과 눈을 맞추는지, 누구의 후견인이 자리를 뜨는지, 그 모든 게 정보가 되어 오갔다.
"이서린 아가씨."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지헌 왕자였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 온화한 인상. 나이답지 않게 침착한 눈빛을 가진 소년이었다.
키는 이서린보다 조금 작았지만, 등을 곧게 세우고 서 있는 자세만큼은 이미 왕족의 것이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자님."
이서린이 예를 갖춰 인사했다.
허리를 굽히는 각도, 스커트를 살짝 들어 올리는 손짓 하나까지 흠잡을 데 없었다. 저 나이에 저런 예법을 완벽하게 익혔다는 게, 새삼스레 그녀가 살아온 방식을 짐작하게 했다.
"오늘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지헌 왕자가 미소 지으며 자리로 안내했다.
다과회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적어도 처음 반 시간은.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 낮은 웃음, 정원사가 다듬어놓은 장미 향기가 뒤섞였다. 이서린은 몇몇 견습 영애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자리에 어울렸다. 나는 그 뒤에서 필요한 순간에만 움직였다. 찻잔을 채우고, 냅킨을 건네고, 시선을 낮춘 채로.
'이 정도면 괜찮은데.'
'조용히 지나가겠구나.'
그런 생각을 한 게 실수였다.
소란이 시작된 건, 정원 구석에서였다.
"거기, 물 좀 더 따라."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한도현이었다.
검은 머리, 짙은 눈썹, 나이보다 커 보이는 체구. 벌써부터 어깨가 떡 벌어진 게, 자기 아버지의 덩치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했다.
그는 견습 영애들 몇 명을 마치 하녀처럼 부리고 있었다.
"공자님, 저희는 견습 귀족……"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한도현이 짜증스럽게 잔을 흔들었다.
찻잔의 물이 튀어 견습 영애의 드레스 자락에 얼룩이 졌다.
영애의 눈에 눈물이 고였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주변 어른들도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한씨 공작가의 아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를 제지할 수 있는 건 지헌 왕자뿐이었다.
공작가의 위세는 왕궁 안에서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어른들이 눈치를 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자식이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그 뒤에 있는 이름이 너무 무거웠다.
하지만 지헌 왕자는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쪽 소란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나는 이서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 밑으로 흐르는 온도는 완전히 달랐다. 저 미소는 사교용이고, 진짜 표정은 눈에만 담겨 있었다.
"이안."
그녀가 낮게 말했다.
"찻잔 좀 가져다줘."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했다.
나서지 말고, 조용히 상황을 정리하라는 뜻이었다. 소란을 크게 만들지 않으면서, 저 겁먹은 영애를 저 자리에서 빼내라는.
나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한도현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한도현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짙어졌다. 값비싼 향유 냄새와, 그 밑에 깔린 짜증의 열기.
"공자님, 차가 필요하십니까."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도현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시선이 발끝에서 시작해 얼굴까지 천천히 올라왔다. 사람을 평가하는 눈빛이었다. 값을 매기는 듯한.
"넌 뭐야."
"가온 백작가의 견습 집사, 이안입니다."
"백작가 집사가 왜 여기 있어."
목소리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섞였다.
"이서린 아가씨의 명을 받아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한도현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서린이라."
그가 이서린이 있는 쪽을 힐끗 돌아봤다. 눈빛에 소유욕 같은 게 스쳤다.
"곧 내 여자가 될 애지."
방금 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뭐?'
'내 여자?'
머릿속이 잠깐 하얘졌다. 이서린과 한도현이 무슨 이야기가 오간 적이 있었나. 아니면 저 자식 혼자 하는 망상인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근처 테이블 위 찻잔이 살짝 흔들렸다. 물 표면에 잔물결이 퍼졌다.
'참아.'
'지금 여기서 드러내면 안 돼.'
'이 자리에서 능력을 드러내면, 이서린 아가씨한테 무슨 화가 미칠지 몰라.'
나는 숨을 깊게 삼키며 흔들림을 억눌렀다.
찻잔은 다시 잠잠해졌다. 물결이 가라앉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이마에 식은땀이 살짝 배었다.
"차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나는 정중히 물러났다.
목소리에 떨림이 섞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등 뒤에서, 한도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야, 거기 너."
그가 겁먹은 견습 영애를 다시 불렀다.
"내가 언제 그만두라고 했어?"
영애의 손이 떨리며 찻주전자를 놓쳤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찻잔이 대리석 바닥에 부서졌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몇 조각은 영애의 신발 근처까지 날아갔다.
한도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목덜미까지 핏기가 올라왔다. 이마에 핏줄이 살짝 섰다.
"이 멍청한……"
그가 손을 들어올렸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손이 영애의 뺨을 향해 떨어지는 궤적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나는 몸이 먼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