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죽는 순간, 이서윤은 딸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피 냄새가 올라오고, 시야 끝에 걸린 것은 붉은 융단 위로 힘없이 쓰러진 이하윤의 작은 어깨였는데……. 그 곁에 선 왕태자 정하람의 얼굴에는 어떤 죄책감도 없었고, 오히려 지루한 연극이 끝났다는 듯한 표정만이 스쳐 지나갔다. 서윤, 그녀의 이름이었다. 살아 있을 적엔 그저 청하 공작 선우현의 아내라는 이름으로만 불렸던 여자, 그 여자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딸의 죽음이었다.
내가 죽였구나. 내가 술에 절어 방치했던 그 아이를, 결국 내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구나. 술잔을 붙들고 지새운 밤들이, 딸의 눈물을 못 본 척 넘겨버린 순간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가, 이내 붉은 융단 위로 흩어졌다. 그 자각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지워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작은 노파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노파는 시든 나무껍질 같은 얼굴에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는, 어딘가 신령스러운 기운을 두르고 있었는데, 두 손을 모으고 실을 다루듯 허공을 매만지며 낮게 중얼거렸다. 실이 엉킨 자리마다 희미한 빛이 맺혔다가 스러지고, 그 빛의 잔상이 노파의 손끝을 따라 허공에 문양을 그렸다.
"네 원(願)이 참으로 무겁구나."
"저를…… 돌려보내 주세요. 딸이 죽기 전으로. 부탁드립니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이서윤은 이마를 바닥에 붙인 채 애원했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손끝이 떨렸지만 그런 것쯤 아무 상관 없었다. 딸을 살릴 수 있다면, 그 값이 무엇이든 치를 각오였다. 노파는 오래도록 침묵하다가, 마치 저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눈으로 짧게 답했다.
"허나 이번엔 남편의 사랑을 구하려 들지 말라. 그것이 네 딸을 죽인 독이었으니."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상이 소용돌이치듯 뒤틀렸다. 노파의 형체가 물속에 떨어진 먹처럼 번지며 흩어지고, 서윤은 그 흩어짐 속으로 함께 빨려 들어갔다.
* *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낯선 침대의 서늘한 감촉이었다. 이불의 결이 낯설고, 베개에서 나는 향유 냄새마저 생소했다. 서윤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잠시 숨을 고르다가, 문득 자신의 손을 들어 보았는데……. 손등에 잡혀 있어야 할 검버섯 같은 얼룩과 술 때문에 붓던 살이 사라지고, 대신 매끈하고 젊은 살결이 자리하고 있었다.
맙소사, 내게 이런 일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곧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그녀는 벌떡 일어나 화장대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맨발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밟는 감각조차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거울 속에는 서른을 훌쩍 넘긴 여자가 아니라, 갓 스물다섯을 넘겼을 법한 여자가 서 있었다. 비단결 같은 흑발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고, 눈동자는 안개 낀 새벽 숲처럼 깊고 서늘한 빛을 담고 있었으며, 술로 무너졌던 피부는 세필로 그린 듯 맑고 고왔다. 광대뼈 아래 옅게 남은 그늘조차, 병색이 아니라 그저 젊은 여인의 서늘한 분위기로만 보였다.
그녀는 손끝으로 제 얼굴을 더듬어보다가 실소를 터뜨렸다. 이게…… 정말 나라고? 눈가 잔주름도, 입술 끝의 갈라짐도,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낡은 그림 위에 새 물감을 덧칠한 것처럼.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시녀 하나가 들어왔다가, 서윤의 표정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손에 들고 있던 물주전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마, 마님? 어디 안 좋으십니까? 안색이……."
"안색이 왜."
"그, 그게…… 오늘따라 유독 또렷하셔서요. 어제까지는……."
시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어제까지는 그녀가 술병을 끌어안고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서윤은 그 말의 뒷맛을 곱씹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전생의 자신이 얼마나 망가져 있었는지, 남의 입을 통해 다시 확인받는 기분이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벽에 걸린 술병 자국이며, 이불에 스민 술 냄새며, 그 모든 흔적들이 아직도 방 안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오늘부터는 다를 거야." 그녀는 낮지만 단호하게 말했고, 시녀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주전자를 내려놓는 손끝이 아직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방을 나서기 전, 서윤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정원 저편, 마당을 가로지르는 작은 그림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겨우 열다섯 살 소녀치고는 너무나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하녀들 눈치를 살피며 걷는 그 아이가, 다름 아닌 이하윤이었다.
살아 있다. 정말로, 살아 있어. 서윤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쉬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붉은 융단 위에 쓰러졌던 그 작은 어깨의 잔상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렸으나, 지금 저 멀리 걷고 있는 아이는 분명히 두 발로 서 있었다.
그녀는 신발을 제대로 신을 새도 없이 복도를 내달렸다. 우당탕, 방문에 어깨를 부딪히는 소리가 났지만 통증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나가던 하녀 하나가 놀라 벽에 붙어 서며 눈을 크게 떴지만, 서윤은 그런 시선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가며 정원으로 나선 순간, 이하윤이 놀란 얼굴로 뒤돌아보았다.
"어, 어머니……? 이 시간에 어쩐 일로……."
딸의 목소리는 낯설고도 그리웠다. 서윤은 대답 대신 그 작은 몸을 와락 끌어안았고, 이하윤은 어리둥절한 채로 그 품 안에서 굳어버렸다. 아이의 어깨는 서윤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작고 여렸다.
"어머니, 왜 이러세요?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시죠?"
딴 세상 사람처럼 낯선 어머니의 온기에 이하윤이 조심스레 물었을 때, 서윤은 그저 고개를 저으며 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의 머리에서 나는 옅은 풀냄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안아주지 못했던 그 밤의 후회를 조금이나마 덮어주는 듯했다. 다시는, 다시는 널 혼자 두지 않을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가슴속에서만 맹세로 굳어졌다.
"어머니, 사람들이 봐요……." 이하윤이 낮게 속삭였지만, 서윤은 팔에 힘을 풀 생각이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남들의 시선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얼싸안고 있는 사이, 저 멀리 회랑 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각하께서 오늘 손님을 초대하셨다더군요. 월현 자작 영애와 그 따님 되시는 분이라고……."
하녀들끼리 소곤거리는 소리였는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서윤의 등줄기가 서늘하게 굳었다. 한서인. 그리고 한소이. 품 안에 있던 딸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온기마저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악몽이, 벌써 문턱을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