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두 번째 삶, 딸을 위해

3화

며칠이 지나도록 서윤은 낯선 삶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전생에선 술기운으로 흐릿하게 지나쳤던 저택의 규칙들, 시녀들의 이름, 심지어 다과 시간에 나오는 찻잎의 종류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배워야 했는데, 그 모든 게 어색하고도 우스운 일이었다. 이 저택은 대체 왜 요일마다 마시는 차가 정해져 있는 건지, 서윤은 속으로 몇 번이나 투덜거렸다. 월요일은 백차, 화요일은 재스민, 수요일은 캐모마일…… 이런 걸 다 외우고 있어야 마님 노릇을 제대로 하는 건가 싶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님, 오늘 다과는 백차로 준비할까요, 아니면 재스민으로……." "어, 아무거나……." 라고 답했다가, 시녀의 곤란한 표정을 보고서야 이 저택에서는 요일마다 정해진 다과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아이고, 이런 것까지 다 잊어버렸구나. 서윤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겨우 체면을 차렸다. "재스민으로 하자꾸나. 오늘 같은 날씨엔 그게 낫겠지." 대충 둘러댄 말이었는데도 시녀는 다행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저 정도 즉흥 대응력은 전생에 술자리에서 갈고닦은 거였으니, 이럴 때 쓰라고 있는 재주였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반면 이하윤과의 시간은 하루하루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서윤은 저녁마다 딸의 방을 찾아가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는 습관을 만들었는데, 처음엔 이하윤도 어색해하며 침대 끝에 걸터앉은 어머니를 힐끗거리기만 했지만, 점점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쪽이 되어갔다. 어느 날은 자수 이야기를, 어느 날은 정원에 핀 꽃 이야기를, 또 어느 날은 시녀들 사이에서 떠도는 우스운 소문까지 조잘조잘 늘어놓았다. "어머니, 오늘 재봉사가 가져온 옷감 색이 정말 예쁘더라고요. 옥색이었는데……." "그래? 다음엔 그 색으로 지어달라 하자." "진짜요? 그, 그럼…… 소매는 조금 짧게 해도 될까요? 요즘 것들은 자꾸 손목까지 답답하게 오더라고요." "네가 원하는 대로 해야지. 여긴 네 옷이잖니." 이런 사소한 대화들이 쌓여가면서, 두 사람 사이에 전생에는 없던 온기가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서윤은 밤마다 그 대화들을 곱씹으며, 이것이야말로 두 번째 삶에서 얻은 진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저택의 예산이야 재봉사 청구서 볼 때마다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야 했지만, 딸의 웃는 얼굴 값어치는 그런 계산으로 따질 수 없는 거였으니까. * * * 그러던 어느 날, 서윤은 저녁 무렵 정원을 지나다가 낯선 웃음소리를 들었다. 회양목 그늘 아래, 한소이가 이하윤의 손목을 붙잡고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는데, 그 표정만은 다정해 보였지만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낮고 서늘했다. 노을빛이 두 소녀의 얼굴에 붉게 번져, 마치 세필로 그린 자매의 그림 같았지만, 서윤의 눈에는 그 그림 속 한 사람의 손끝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동생, 이 팔찌 예쁘지 않아? 언니가 특별히 널 위해 골라온 거야." "고, 고마워요, 언니……." 이하윤의 대답이 어색하게 끊기는 걸 보며, 서윤은 걸음을 멈추고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단순한 놀람이 아니라는 걸 서윤은 곧 깨달았다. 한소이가 손을 뻗어 이하윤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는 순간, 서윤의 눈에 이하윤의 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이 스쳤다. 팔찌를 채우는 시늉을 하며 손목을 세게 비틀었던 모양이었다. 저 자국, 저건 애정에서 나온 손길이 아니다. 서윤은 전생의 기억이 순식간에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숨을 죽였다. 전생에서도 저랬었지. 다정한 얼굴로 웃으며 딸을 조금씩 갈아 먹던 그 손길이, 지금 눈앞에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때는 그저 자매간의 우애라고, 저 웃음 뒤에 뭐가 숨어 있는지 알아채지 못한 채 흘려보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서윤은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나무껍질을 꽉 움켜쥐었다. 서윤은 저도 모르게 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 "소이야." 그녀의 목소리에 두 소녀가 동시에 놀라 돌아보았고, 한소이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순진한 미소가 덧씌워졌다. 그 전환이 너무나 빠르고 매끄러워서, 서윤은 잠시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저건 연습된 표정이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얼굴이 아니었다. "어머, 부인, 언제부터 계셨어요? 하윤이랑 예쁜 팔찌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래 보이는구나." 서윤은 애써 담담한 어조를 유지하며 이하윤의 손목을 슬쩍 확인했는데, 붉은 자국은 여전히 선명했다. 손가락 다섯 개가 남긴 자국이, 마치 낙인처럼 하얀 살결 위에 도장을 찍어놓은 것 같았다. "하윤아, 손목이 왜 이러니." "아, 이건…… 그냥 조금 눌려서요. 별거 아니에요." 이하윤은 서둘러 소매를 끌어내리며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지만, 그 웃음이 어딘가 억지스러웠다. 마치 어른들에게 걱정 끼치지 않는 법을 오래전부터 훈련받은 사람처럼. 서윤은 그 모습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아이는 아직도 어른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법을 먼저 배웠구나. 전생과 다르지 않은 그 습관이, 지금 이 순간 서윤의 심장을 서늘하게 옥죄었다. 한소이는 곧 화제를 돌리며 능숙하게 자리를 마무리했다. "부인, 저는 이만 어머니께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하윤아, 다음에 또 놀자."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그 발걸음 소리는 유난히 가볍고 경쾌하게 정원을 울리며 멀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윤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딸의 손목을 조심스레 잡아 소매를 걷어보았다. 붉은 자국은 손가락 모양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윤아, 언니가 자주 이렇게 하니?" "아…… 아니에요, 오늘 처음이에요. 정말이에요." 이하윤의 눈이 흔들리는 걸 보며, 서윤은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아이의 눈동자는 안개 낀 숲처럼 흐려져서, 그 속에 숨은 진짜 마음을 다 가려버리려 애쓰고 있었다. 딸을 다그치는 대신, 서윤은 조용히 그 손목을 감싸 쥐며 낮게 말했다. "괜찮아, 말하기 싫으면 지금 안 해도 돼. 하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나한테 먼저 말해줘. 알겠지?" 이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어딘가 겁먹은 얼굴이었는데, 그 표정 속에 숨은 오래된 불안이 서윤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이 아이는 벌써 배웠구나, 어른에게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서윤은 딸의 머리를 끌어당겨 품에 안으며, 속으로 다짐을 새로이 굳혔다. 이번에는 절대로, 이 아이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품 안에서 이하윤의 몸이 작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 떨림이 멈출 때까지, 서윤은 오래도록 딸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저 멀리 저택의 불빛 아래로 사라진 한소이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정원 어딘가에 남아 서늘하게 맴도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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