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왕태자 정하람의 방문 소식이 전해진 것은 아침 해가 채 마르지 않은 이슬 위로 떨어지던 무렵이었는데, 그 한마디에 저택 전체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하기 시작했다. 하인들은 정원 곳곳을 분주히 쓸고 닦았고, 정원사는 이미 시들기 시작한 꽃 몇 송이를 뽑아내며 연신 이마의 땀을 훔쳤으며, 요리사들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재료를 준비하며 부산을 떨었는데—대체 왕태자 한 명이 오는데 소를 몇 마리나 잡을 셈이냐고, 서윤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그 소란 속에서 홀로 냉기를 느끼고 있었다.
정하람. 이하윤의 혼약자이자, 전생에선 그녀를 무참히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름. 지금의 그는 아직 그 죄를 짓지 않았고, 어쩌면 앞으로도 짓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서윤의 가슴속엔 여전히 그날의 피 냄새가 남아 있었다. 목덜미에 닿았던 차가운 검날의 감촉이, 지금도 이렇게 맑은 아침이면 불쑥 되살아나 그녀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가곤 했다.
"어머니, 저 오늘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이하윤이 옷장 앞에서 서성이며 물었을 때, 서윤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옥색 드레스를 골라주었다. 손끝에 닿는 비단의 결이 차갑고 매끄러워, 마치 그 서늘함이 딸의 앞날에 대한 불안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이게 좋겠구나. 네 얼굴빛에 잘 어울려." 딸은 그 말에 발그레해진 얼굴로 옷을 받아 들었지만, 서윤의 속은 편치 않았다. 이 만남이 그저 평범한 인사치레로 끝나기를, 그녀는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제발, 오늘만큼은, 하고.
오후가 되어 정원에 나선 자리, 정하람은 예상보다 훨씬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이하윤에게 인사를 건넸다. 짙은 남색 예복을 걸친 그의 모습은 확실히 눈에 띄는 미남자였는데, 이목구비가 마치 세필로 정성껏 그려낸 듯 단정하여 처음 보는 이라면 누구든 그 앞에서 잠시 숨을 죽일 법했다. 하지만 서윤은 그 미소 뒤에 숨은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저 웃음, 저 다정한 목소리. 전생에서도 저랬었지. 마지막 순간까지도.
"영애,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네, 전하. 염려해주신 덕분에……." 이하윤이 예를 갖춰 답하는 동안, 정하람의 시선은 잠시 이하윤의 뒤편, 화단 근처에 서 있던 한소이 쪽으로 옮겨갔다. 그 짧은 시선의 이동을, 서윤은 놓치지 않았다.
한소이는 그 시선을 느낀 듯 살짝 고개를 숙이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는데, 그 몸짓 하나하나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서윤조차도 순간 속아 넘어갈 뻔했다. 뺨에 살짝 피어오르는 홍조며, 손끝으로 옷깃을 만지며 시선을 피하는 그 모습까지—배우라도 저보다 잘하기 힘들겠다 싶을 정도였다. 저건, 연습된 몸짓이야. 서윤은 이를 악물며 딸의 곁으로 슬쩍 다가섰다. "전하, 오늘 이렇게 왕림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함께 산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서윤이 먼저 말을 꺼내며 자연스럽게 딸의 곁을 지켰고, 정하람은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예의를 갖춰 고개를 끄덕였다.
산책은 겉으로는 평온하게 흘러갔다. 정하람과 이하윤이 나란히 걸으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서윤은 한 걸음 뒤에서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봄바람이 정원의 나무들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며 잎사귀 소리를 냈고, 저 멀리서 새 한 마리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평화로운 풍경 한가운데 서윤의 마음만이 홀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소이가 슬쩍 옆으로 다가와 이하윤의 발치에 놓인 작은 돌을 은근슬쩍 툭 건드리는 것을 목격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다. 누가 봐도 우연인 것처럼 보일 만큼, 손끝으로 스치듯.
이하윤이 발을 헛디디며 휘청였고, 정하람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괜찮으십니까, 영애." "아, 네…… 감사합니다, 전하." 이하윤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지만, 서윤은 이미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는 듯했다.
한소이는 재빨리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섰다. "어머, 하윤이 발밑에 돌이 있었나 봐요. 제가 미리 살펴봤어야 했는데……." 그 말에는 자책이 담겨 있었지만, 서윤의 눈에는 그것이 오히려 완벽한 알리바이처럼 보였다. 저 아이는 지금, 스스로 상황을 만들고 스스로 그것을 수습하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전생에서도 늘 이런 식이었지. 겉으로는 다정하고, 안으로는 서서히 갈아 먹는. 처음엔 작은 돌부리, 다음엔 흘린 물 한 방울, 그러다 어느 순간엔 목숨이 오가는 자리에서까지—서윤은 그 끝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손끝이 떨렸다.
서윤은 더는 참을 수 없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소이야, 방금 그 돌을 발로 건드리는 걸 봤는데."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순간 정원의 공기가 얼어붙었고, 하인들도, 새소리조차도 잠시 멈춘 듯했으며, 한소이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부, 부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그저……." "내가 잘못 본 걸까?" 서윤은 딱딱한 어조로 되물으며 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 순간, 정하람이 미묘하게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부인,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소이 영애가 그럴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 한마디가, 서윤의 가슴에 얼음처럼 박혔다. 전생에서도 늘 이랬다. 누구도 한소이의 악의를 의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진실을 말하는 쪽이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곤 했었다. 서윤은 입술을 깨물며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차갑게 다짐하고 있었다. 이 아이가 하윤이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이번엔 반드시 증거를 잡고 말겠다고. 두 눈으로 직접 보았어도 믿지 않는 세상이라면,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무언가를 손에 쥐어야 했다.
산책이 어색하게 끝나고 정하람이 떠난 뒤, 이하윤은 어머니의 소매를 붙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어머니, 저 때문에 괜히 소란을……." 그 목소리엔 죄스러움이 가득 묻어 있어, 서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아니야, 하윤아. 네 잘못이 아니야." 서윤은 딸을 다독이며 그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서늘하게 얼어 있었다. 오늘의 작은 사건이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는 뼈저리게 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저택 뒤편 하인 처소에서 은밀히 오가는 서찰 한 장이, 아직 아무도 모르는 채로 조용히 봉인되고 있었다. 달빛조차 닿지 않는 그늘 속에서, 누군가의 손끝이 촛불 아래 붓을 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