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가을이 깊어지면 한양의 저잣거리는 해가 지고 나서야 비로소 살아난다는 말이 있었다. 낮 동안 볕을 피해 숨어 있던 장사치들이 등롱에 불을 붙이고 나와 좌판을 벌이면, 그제야 사람들은 하루의 진짜 볼일을 시작한다는 뜻이었는데, 온성가의 밤은 그와 정반대로 흘러갔다. 좌의정 이정헌의 저택은 해가 지면 대문이 굳게 닫히고 사랑채의 불빛만 늦도록 남아 있었으며, 안채는 이미 이경이 되기 전에 정적에 잠기는 것이 관례였다. 하인들조차 그 시각이 되면 발소리를 죄어 걷는다는 것을, 서연은 어릴 적부터 몸으로 배워 알고 있었다. 그 정적 속에서 이서연은 열여덟 해를 살아왔다.
서연은 온성가의 막내딸이었다. 위로 오라비 이현민이 있고 그 아래로 세 언니, 이현주와 이지원과 이수아가 나란히 있었는데, 다섯 남매 중 유독 서연만이 어릴 때부터 말이 없고 웃음이 드물다는 평을 들었다. 큰언니 현주는 그런 서연을 두고 "쟤는 원래 저래요, 어머니를 닮아서" 하고 웃어넘기곤 했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서연은 속으로 실소를 삼켰다. 어머니를 닮았다는 말은 이 집안에서 결코 좋은 뜻이 아니었으나, 언니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그러나 그것은 서연이 원래 그런 아이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 저택에서 입을 여는 순간 반드시 누군가의 말꼬리에 걸려 넘어진다는 걸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다는 것. 그것이 서연을 다른 자매들과 다르게 만든 단 하나의 이유였는데, 언제 어떻게 그 기억이 시작되었는지는 서연 자신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으나, 다만 사람이 한번 죽어 다시 태어나면 웬만한 억울함쯤은 그저 흘러가는 계절처럼 견딜 수 있게 된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어머니 한소진은 집에 없는 날이 더 많았다. 아버지 앞에서는 자애로운 안색을 잃지 않는 여인이었으나 자식들 앞에서는 전혀 다른 얼굴을 꺼내 놓는다는 걸, 서연은 아주 어릴 때 처음 알았다. 회초리를 들지 않는 대신 말로 사람을 벼랑까지 몰아세우는 재주가 있었는데, 그 재주 앞에서 언니들은 매번 눈물을 보였고 오라비 현민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쪽을 택했다. 오직 서연만이 그 앞에서 눈을 내리깐 채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한소진의 화를 더 돋운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처음으로 사람에게는 두 개의 얼굴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배운 셈이었다. 성녀의 가면을 쓴 악마. 저잣거리 소문에 그런 말이 돌 정도였으니, 그 아래서 자란 딸들 중 누구도 온전하게 자라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날 밤도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서연은 시비 김소영이 지켜 주는 뒷문으로 나가, 담장을 따라 걷다가 인적이 드문 개천을 건너 저잣거리로 향했다. 소영은 뒷문 옆에 쭈그려 앉아 서연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늘 그랬듯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기씨." 그 말에는 걱정과 공모의 감정이 함께 섞여 있었는데, 서연은 그 목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달빛도 없는 그늘진 골목을 지나며 서연은 품속에 감춰 둔 무명 보따리를 다시 한번 만져 보았는데, 그 안에는 낡은 저고리 한 벌과, 얼굴을 가릴 두건이 들어 있었다. 저고리는 원래 소영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서연의 몸에 더 익숙하게 맞았고, 두건은 몇 번이나 빨아 색이 바래 있었다. 온성가의 막내 영애가 저잣거리 주막에서 술을 나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김소영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서연이 지난 반년 동안 가장 소중히 지켜 온 비밀이었다.
주막 '삼거리집'의 문을 밀고 들어서면, 서연은 언제나 잠시 숨을 골랐다. 온성가에서는 침묵해야만 안전했지만, 이곳에서는 목소리를 높여도 아무도 그것을 흠으로 잡지 않았다. 화로 위 국솥에서 올라오는 김이 낮은 천장에 부딪치며 흩어지고, 취객들의 웃음소리와 나무 그릇 부딪는 소리가 뒤섞여 하나의 소음으로 뭉쳐지는 그 공간이, 서연에게는 어느 순간부터 저택보다 더 익숙한 곳이 되어 있었다. "어이, 새 아이 왔나!" 취객 하나가 걸걸한 목소리로 외치자, 주모가 국자를 든 채로 눙치듯 받아쳤다. "입 다물고 술이나 받으쇼." 그 말에 좌중이 웃음을 터뜨렸고, 서연도 두건 속에서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옆에서 술상을 나르던 다른 계집아이가 서연의 소매를 슬쩍 잡아끌며 "저쪽 상부터 치우자, 저 아저씨 또 술주정할 판이다" 하고 낮게 속삭였다. 여기서는 아무도 그녀에게 버릇없다 말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그저 손이 빠르고 눈치가 좋은 계집아이일 뿐이었다.
일이 끝나고 받은 동전을 세는 순간이 서연에게는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주모가 손에 쥐여 준 동전 몇 닙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하나씩 세어 볼 때면, 저택 안에서는 결코 느껴 본 적 없는 종류의 안도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올랐다. 품삯을 모아 둔 작은 항아리는 이제 제법 무게가 나갔는데, 항아리 입구까지 동전이 쌓이는 걸 지켜보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버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무 살이 되어 이 집을 나설 때까지 앞으로 두 해, 그 두 해만 버티면 된다고 서연은 몇 번이고 되뇌었다. 두 해. 길지 않았다. 전생에서 겪었던 더 긴 인내들을 생각하면, 그것은 오히려 짧은 편이었다. 그러니 견딜 수 있었다. 다만 항아리 뚜껑을 닫으며 서연은 문득 생각했다. 이 비밀이 언제까지 지켜질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답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연은 두건을 다시 눌러쓰고 어두운 골목으로 나섰는데, 등롱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며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 그림자가 마치 저택의 담장처럼 서연의 발밑에 겹쳐지는 걸 보며, 서연은 어쩐지 오늘 밤은 유난히 춥다고 생각했다. 걸음을 옮기던 서연이 문득 걸음을 멈춘 것은 골목이 꺾이는 어귀에서였다. 등 뒤에서 자박, 하고 무언가 발을 옮기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서연은 숨을 죽이고 뒤를 돌아보았으나, 골목에는 흔들리는 등롱 그림자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헛것을 들었나.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는데, 몇 걸음 채 못 가 또다시 그 소리가 따라붙었다. 이번에는 분명했다. 누군가 서연의 걸음을 따라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