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국경의 성녀, 궁정의 마물

1화

왕성 편전의 공기는 서늘했다. 이른 아침의 냉기가 채 가시지 않은 대리석 기둥 사이로 옅은 먼지 냄새가 감돌았고, 높은 창을 통해 스며드는 빛조차 핏기 없는 잿빛으로 바닥에 내려앉아 있었다. 세자 이현은 상석에 앉아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눈앞에 무릎을 꿇은 북부군 전령을 내려다보았고, 그 눈빛에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의심이 고여 있었다. 손끝이 팔걸이의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편전의 침묵을 규칙적으로 갈랐다. "다시 말해보아라. 국경 방벽이 뚫린 그날 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령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칠 겨를도 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갑주 사이로 흘러내린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 바닥에 옅은 얼룩을 남겼다. "마, 마물의 무리가 갑자기 방벽 너머에서 몰려들었고, 성녀님께서 성력으로 그것들을 물리치셨습니다. 병사들의 사상은 크지 않았고, 방벽 역시 하루 만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다만……" "다만?" "성녀님이 진영을 비운 사이에 그 일이 벌어졌다는 병사들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이현의 턱이 단단하게 조여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뚜렷했다. 그는 손가락을 팔걸이에서 떼어내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는데, 그 몸짓 하나에 편전 안의 공기가 한층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좌우로 늘어선 대신들이 숨을 죽였고, 누군가는 조복 자락을 슬며시 여미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서은채가, 마물이 몰려들 것을 알고 자리를 비웠다는 말이냐." "저, 저는 그저 병사들이 하는 말을 전할 뿐이라……, 진영에 없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이유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돌아오신 뒤 성녀님의 옷자락에 흙먼지가 없었다는 말도 있었사옵니다." "흙먼지가 없었다?" "예, 전하. 마물을 물리치신 분의 차림이 지나치게 정갈했다는……, 그런 뒷말이 병영에 돌았을 뿐입니다." 전령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순간, 옆에 서 있던 목하린이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남작가의 영애답게 화려하지 않은 옷차림이었으나, 그 걸음걸이만은 이상하게도 미끄러지듯 부드러워 편전 안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당겼다. 소맷단이 스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걸음이었는데, 그것이 마치 뱀이 마른 풀 위를 지나가는 소리처럼 낮고 매끄러웠다. "전하, 감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목하린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입을 열었다. 존대의 결이 지나치게 매끄러워, 듣는 이의 경계심을 오히려 무디게 만드는 화법이었다. "국경에서 돌아온 시녀 하나가 제게 은밀히 털어놓은 것이 있사옵니다. 소녀 역시 처음에는 믿지 않았사오나, 워낙 자세한 정황이라 감히 묵과할 수 없었사옵니다." "말해보아라." "서은채 영애께서 국경으로 떠나기 전, 어느 낯선 자와 밀실에서 대화를 나누셨다 하옵니다. 그 자의 정체는 아무도 몰랐으나, 검은 외투를 두르고 얼굴을 가린 채였다고 하였습니다. 대화가 끝난 뒤 그 밤에 마물의 습격이 있었다고……,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도 시일이 딱 맞아떨어졌사옵니다." 말끝을 흐리는 목하린의 눈매에는 슬픔인지 조심스러움인지 구분되지 않는 옅은 물기가 어려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진위를 의심할 여지를 지워버리는 효과를 냈다. 편전 안의 대신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낮은 웅성거림을 흘렸고, 그 소리는 마치 마른 낙엽이 바스락거리듯 편전 바닥을 채워갔다. 누군가는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며 소리 없이 혀를 찼고, 나이 든 대신 하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목하린의 옷자락을 훑어보았다. 이현은 관자놀이에 힘줄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짓씹었다. 서은채.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식는 듯한 감각이 있었으나, 그것이 배신감인지 실망인지 그 자신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네가 그럴 리가 없다고 믿고 싶은데.* *믿고 싶은 것과 믿어야 하는 것이 다르다는 걸, 이 자리가 자꾸만 일러주는구나.* "목 영애." 그가 낮게 불렀다. "그 시녀를 지금 이 자리로 데려올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목하린이 눈을 내리깔며 손끝을 옷자락에 가져갔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듯 보였는데, 그것이 두려움인지 계산된 몸짓인지 구별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 시녀는 이 일을 아뢴 다음 날 갑자기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웠다 하옵니다. 마치 무언가에 씐 것처럼 말을 잃었다고요. 의녀를 불렀으나 원인을 알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 말에 편전의 공기가 다시 한번 무겁게 가라앉았다. 병을 얻은 시녀, 말을 잃은 증언자.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을, 누군가에게는 확신을 심어주는 조합이었고, 이현에게는 후자에 가까웠다. "공교롭구나." 이현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증언이 나온 다음 날, 증언한 자가 입을 다물다니." "소녀도 그것이 이상하여,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였사옵니다. 혹여 성녀님을 음해하려는 세력이 그 시녀를 해한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에서였사옵니다." 목하린은 그렇게 덧붙이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그 말은 서은채를 옹호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뜻은 오히려 의혹을 한 겹 더 두껍게 덧씌우는 것이었다. "성녀라는 신분을 앞세워 이런 짓을 벌였다면……" 이현이 낮게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대신들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아직 확증된 것은 없사옵니다. 서은채 영애는 대현공작가의 영애이시며, 그간 국경에서 세운 공도 적지 않습니다. 그 공을 하루아침에 의심으로 덮는 것은 너무 이르지 않을까 하옵니다." "공을 세웠다고 죄를 벗는 것은 아니지." 이현의 목소리가 갈라진 유리처럼 날카롭게 편전을 갈랐다. "오히려 공을 세운 자리에서 배후를 숨기기가 더 쉬웠을 테니. 누가 성녀를 의심하겠느냐. 그 자리 자체가 이미 방패가 아니더냐." 편전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세자의 목소리에는 이미 판결을 내린 자의 확신 같은 것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으로는 왕성의 정원이 황금빛 오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으나, 그의 눈에는 그 풍경조차 서은채의 얼굴과 겹쳐 보이는 듯했다. 냉정하고, 흔들림 없고, 언제나 자신보다 한 걸음 앞서 걷는 듯했던 그 얼굴. 국경에서 마지막으로 마주쳤을 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담담했었는데 그 담담함이 지금은 왠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네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내가 알아낼 것이다.* "진위는 밝혀낼 것이다." 그가 등을 돌린 채 말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서은채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라. 그녀가 왕성으로 돌아오는 즉시 모든 행적을 보고하도록. 만나는 자, 나누는 대화, 심지어 걸음의 방향까지 빠짐없이 적어 올리라." "명 받겠사옵니다." 대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고, 그 침묵을 메우는 것은 오직 목하린의 옅은 숨소리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입꼬리를 아주 살짝 끌어올렸는데, 그 미소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편전의 불빛이 그녀의 등 뒤로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렸고, 그 그림자는 이상하게도 사람의 형상이라기엔 지나치게 길고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뱀이 몸을 세우려는 순간처럼. 이현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의 나무들 사이로 시녀 몇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중 누구도 그가 지금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알지 못한 채 평온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평온함이 오히려 그의 속을 더 뒤틀리게 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서은채라는 이름 위에 붉은 선이 그어지고 있었으나,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판단인지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전령이 물러가고 대신들의 발소리가 하나둘 편전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목하린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세자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딱 한 번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편전의 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가 울렸고,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현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낮게 되물었다. "목 영애." "예, 전하." "그 낯선 자에 대해서는, 더 알아낸 것이 없는가." 목하린은 잠시 침묵했다. 그 짧은 정적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묘하게 빛났는데,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이 편전 안에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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