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국경의 성녀, 궁정의 마물

4화

왕궁 대연회장의 문이 열리자, 황금빛 샹들리에 아래 모여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서은채에게 쏟아졌다. 짙은 핏빛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성녀의 흰 예복 대신 대현공작가의 영애다운 화려함을 두르고 있었고, 그 모습은 연회장에 감돌던 웅성거림을 순식간에 갈라놓았다. 드레스 자락이 대리석 바닥을 스치며 내는 소리마저도 이 순간에는 지나치게 크게 들리는 듯했다. "저 사람이……" "국경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던……" 낮은 목소리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잠잠해지는 것을 서은채는 담담히 지나쳤다. 마치 물속을 걷는 듯, 소리는 그녀의 몸에 닿았다가 이내 흩어져 사라졌다. 강도영이 그녀의 반보 뒤에서 함께 걸으며, 검자루에 얹은 손을 아주 자연스럽게 늘어뜨리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것은 단순한 호위가 아니라, 누구든 함부로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녀의 걸음은 조용하고 절제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위압감은 어떤 무기보다 선명했다. "용케 오셨군요." 지나가던 백작 부인 하나가 입가에 웃음을 걸었으나 눈빛만은 차가웠다. 부채를 펼치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서은채는 놓치지 않았다. "국경의 소식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소식이라 하심은." 서은채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되물었다. "영애께서 자리를 비운 사이 벌어진 일 말입니다." 말끝에 얹힌 미묘한 뉘앙스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서은채는 굳이 되묻지 않아도 알았다. "그 자리를 비운 것이 부상병을 옮기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은 들으셨습니까." 백작 부인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부채 뒤로 감춰진 얼굴이 잠시 석고처럼 딱딱하게 변했으나, 그녀는 곧 다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리를 피했다. 그 뒷모습이 마치 도망치듯 빠르게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서은채는 눈으로 좇으며 오늘 밤이 결코 순탄하게 지나가지 않을 것임을 다시금 확인했다. 연회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몇몇 젊은 귀족 남녀가 일부러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듯 무리를 이루었다. 그들의 시선에는 호기심과 경멸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 눈빛들이 마치 한 마리 짐승을 구경하러 온 이들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중 한 남작가 도련님이 짐짓 예의 바른 투로 입을 열었다. "성녀님께서도 이런 자리에 오시는군요. 마물과 결탁했다는 소문 속의 주인공께서." 그의 말투는 존대였으나, 그 속에 담긴 조롱의 결은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뻔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서은채가 무표정하게 답했다. "소문이 아니라면, 어째서 왕성 전체가 그것을 믿고 있을까요." 그 말에 주위의 웃음소리가 낮게 번졌다. 몇몇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고, 몇몇은 아예 대놓고 서은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서은채는 턱을 살짝 들며 그 시선들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감각이 있었으나, 그것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 그녀가 오랜 세월 익힌 유일한 방어였다. *웃어라. 웃고 싶은 만큼 웃어. 그 웃음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두고 볼 일이니.* "믿음은 진실과 다릅니다." 서은채가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국경에서 마물을 물리쳤습니다. 그 사실만이 진실입니다." "진실이라는 말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남작가 도련님이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않으며 되받았다. "증거도 없이 진실이라 우기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성녀답지 못한 태도이지요." 순간 강도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낮게 덧붙였다. "그 자리에 제가 있었습니다. 거짓을 말하는 자가 있다면, 제가 직접 증언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연회장의 소음을 뚫고 정확히 박히는 종류의 것이었다. 근위기사의 단호한 목소리는 젊은 귀족들의 조롱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왕실 근위기사의 증언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고, 그 무게를 모르는 이는 이 연회장 안에 없었다. 남작가 도련님은 헛기침을 하며 슬며시 무리에서 물러났고, 함께 웃던 이들 역시 하나둘 시선을 피하며 뒷걸음질쳤다. 방금까지 짐승을 구경하던 눈빛들이, 이제는 그 짐승이 이빨을 드러낸 것을 본 것처럼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근위기사께서 그리 확언하시니." 누군가 애매하게 웃으며 말을 흐렸다. "다시 생각해 볼 문제겠군요." 그 말을 끝으로 무리는 흩어졌다. 마치 물뱀 한 마리가 사람들 발치를 스치고 지나가자 다들 놀라 갈라지듯, 그렇게 무리는 조용히 흩어져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서은채는 강도영을 향해 짧게 눈짓했다. 고맙다는 말 대신, 그것으로 충분했다. 강도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그 눈빛 안에는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한 확고한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다시 반보 뒤로 물러나 원래의 자리를 지켰고, 검자루에 얹은 손도 처음과 다름없이 자연스러웠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회장 중앙으로 시선이 옮겨가는 사이, 몇몇 대신들이 서은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아까와는 다른, 한 걸음 물러선 예의였다. 근위기사의 증언 하나로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뀐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노골적인 조롱은 잠시 자취를 감췄다. "영애께서 무사히 돌아오셨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한 뚱뚱한 자작이 지나가며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눈은 결코 서은채를 오래 마주치지 않았다. "영애께서 여전히 건재하시다니 다행입니다." 한 백발의 대신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표면적인 존대 아래 그 역시 다른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부드러웠고,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다만 오늘 밤, 전하께서 중요한 발표를 하실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계시는지요." 서은채는 그 질문에 옅은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확인받을 필요는 없었다.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답했다. 백발의 대신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피듯 응시했다. 무언가를 더 캐묻고 싶은 눈치였으나, 서은채의 담담한 표정에서 더는 얻어낼 것이 없다고 판단한 듯 곧 자리를 물러났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서은채는 잠시 눈으로 좇았다. 저 늙은 대신이 누구의 편에 서 있는지, 오늘 밤이 지나면 좀 더 분명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샹들리에의 황금빛이 연회장 바닥을 가득 채우고, 악단의 선율이 낮게 흐르기 시작했다. 현악기의 음이 하나둘 겹쳐지며 공기를 채웠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그 선율에 맞춰 조금씩 느긋해졌다. 서은채는 잠시 그 선율에 몸을 맡기듯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오늘 밤 자신이 서 있는 이 자리가 곧 무너질 것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 직감 속에도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담담한 각오만이 가슴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무너질 자리라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겠다. 다만 그 무너짐이 내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면, 그때는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 강도영이 그녀의 옆얼굴을 슬쩍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그 침묵 속에 어떤 굳은 결심이 서려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질문이 아니라 곁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때, 연회장 입구 쪽에서 새로운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처음의 것과는 결이 다른, 좀 더 낮고 무거운 파동이었다. 사람들의 고개가 하나둘 그쪽으로 돌아가고, 악단의 선율마저 잠시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은채는 그 소리의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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