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쨍—
창문에 부딪힌 아침 햇살이 유독 눈부셨다.
청람 귀족학원, 정문 앞.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도망치고 싶다.
물론 도망칠 데가 없었다. 나는 이미 육 년 전에 한 번 죽었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 삶에서 도망치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었다.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또 도망칠 데를 찾는다니, 이쯤이면 인생이 나를 놀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서지율. 청하 공작가의 장녀. 그 이름은 이제 가문의 족보에도, 사람들의 기억에도 '요절한 아이'로만 남아 있었다. 지금의 나는 강소율. 태호 공작가의 양녀. 종형인 강태민 공작의 보호 아래 이 학원에 입학한, 그냥 그런 신입생이었다.
이름이 두 개라는 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다. 매번 대답할 때마다 반박자씩 늦는다. 남들은 눈치 못 채겠지만 나는 안다. 그 반박자의 지연 속에 내 전생 전부가 들어차 있다는 걸.
"긴장돼?"
옆에서 강태민이 물었다. 열여덟 살, 고등부 3년생, 나보다 두 학년 위. 은발에 서늘한 인상이었는데, 목소리만은 이상하게 부드러웠다.
"안 긴장돼요."
거짓말이었다.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진 것 같았다.
"거짓말치고는 목소리가 떨리네."
"……원래 목소리가 이래요."
태민은 픽 웃고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게 고마웠다. 아니, 어쩌면 그냥 무심한 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오늘 하루,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든 생각은 두 번째였다.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귀족 자제들이 우글우글, 여기저기서 인사를 나누고 웃고 떠들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아이들마다 옷차림도 화려하기 그지없어서, 어디서 저런 자수를 놓았나 눈이 다 즐거울 지경이었다. 돈 지랄 보소, 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 얼굴들 중 몇몇은 낯익었다. 정확히는, 육 년 전 기억 속 얼굴들이었다. 나이는 들었지만 골격이나 눈매는 그대로였다. 저기 저 애는 분명 옛날에 다과회에서 마카롱을 세 개나 훔쳐 먹다 걸린 애였고, 저 옆에 있는 애는 무도회에서 내 드레스 자락을 밟고도 사과 한마디 안 했던 애였다.
기억이라는 게 참 얄궂다. 필요 없는 건 이렇게 선명한데, 정작 마지막 순간의 기억은 흐릿하기만 하다.
쿵.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저기, 저 남자애. 갈색 머리에 곧은 등. 서지훈. 내 오빠였다.
다행히 이쪽을 보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태민의 팔을 붙잡고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뭐야, 왜 그래?"
"그냥…… 신발이 좀 불편해서요."
또 거짓말. 오늘 벌써 몇 번째인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앞으로도 계속될 테니까. 이러다 거짓말 장인이라는 새로운 클래스라도 얻을 판이었다.
입학식장으로 이동하는 내내 나는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시선을 어디에도 두지 않는 게 오늘의 목표였다. 튀지 않기, 눈에 띄지 않기, 존재감을 최소화하기. 그게 내가 육 년 만에 세운 유일한 생존 전략이었다.
말이 전략이지, 사실 그냥 숨만 쉬는 거였다. 숨만 쉬어도 살아지길 바라는 그런 마음.
그런데 인생이란 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법이 절대 없다.
입학식장 안, 자리를 찾아 앉으려는 순간 옆자리에 앉은 아이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금발에 하늘색 눈동자,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저기, 혹시…… 우리 만난 적 있나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니요. 처음 뵙는데요."
"그런가. 되게 낯이 익어서."
머리가 핑 돌았다. 낯이 익다니, 낯이 익다니. 나랑 닮은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다고. 아니, 애초에 서지율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정면을 봤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옆에서 태민이 슬쩍 내 손을 잡았다 놓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손끝의 온도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이 사람은 대체 뭘 알고 이러는 걸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봤다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까 봐 그만두었다.
식이 시작되고, 학장이라는 사람이 나와 뭐라 뭐라 떠들었다. 자유와 배움, 미래의 기둥, 뭐 그런 말들. 어디서 들어본 듣기 좋은 말들만 모아놓은 것 같았다. 회사 신입 연수 때 듣던 사훈이랑 뭐가 다른가 싶었다.
나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생각을 했다.
앞으로 이 년, 아니 졸업까지 몇 년이 될지 모를 이 시간 동안, 나는 이 안에서 죽은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죽은 사람이 학교에 다니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이미 내 인생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걸 어쩌겠나. 개복치처럼 여기저기서 죽을 위기만 넘기며 사는 것도 이젠 익숙해질 지경이다.
식이 끝나고 반이 발표됐다. 나는 다행히 서지훈과 다른 반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강의실 문 앞에서 담당 교사가 명단을 부르기 시작했다.
"강소율."
나는 손을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나에게 모였다.
짧았지만, 그 몇 초가 마치 백 년 같았다.
다행히 아무도 이상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다들 그냥 신입생 얼굴 한 번 확인하는 정도였다. 나는 다시 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안심하기엔 너무 일렀다.
창가 자리에 앉으려는데, 옆줄에 앉은 남학생이 나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강소율 양, 태호 공작가 쪽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청하 쪽과도 연이 있나요?"
청하.
그 두 글자가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니, 그냥. 분위기가 왠지 그쪽 같아서."
분위기가 어떻길래.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나는 최대한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닌데요."
남학생은 별로 신경 안 쓰는 얼굴로 다시 앞을 봤다. 나는 그제야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첫날부터 이렇게 아슬아슬하면, 앞으로 삼 년은 어떻게 버티나.
버틸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 심장 졸이며 살다가는 명이 짧아질 것 같았다. 이미 한 번 짧게 살아본 몸인데, 두 번째 인생도 짧게 끝나면 그거야말로 진짜 억울하지 않겠나.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들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서지훈이었다.
오빠는 웃고 있었다.
옆에 선 친구가 뭐라 말을 건네자, 오빠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었다. 예전에도 저렇게 잘 웃던 사람이었나. 내 기억 속 오빠는 늘 조금 지쳐 보였는데.
그 웃음을 보는데 왜 이렇게 명치가 아픈지, 나는 알 것 같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다.
종이 울렸다. 첫 수업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나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숨을 골랐다.
오늘 하루만, 딱 오늘 하루만 무사히 넘기자.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교실 문이 다시 열리고 새로운 교사가 들어왔다.
마법학 담당이라고 소개하는 그 사람의 손끝에서, 옅은 푸른 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익숙한 빛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그런 빛.
전생에,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봤던 그 빛과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