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필명은 황제였다

3화

파혼이 공표된 다음 날, 강 공작가의 저택에는 아침부터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는데, 하인들의 발걸음마저 조심스러워져 복도를 오가는 소리조차 유난히 낮게 깔려 있었고, 강서연은 방 안에 홀로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지난밤의 일을 되짚고 있었다. 연회장의 샹들리에 아래에서 이하람이 자신을 향해 던졌던 말들이, 마치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났는데, 4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의 옆자리를 지키며 국정을 대행해온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 고작 그런 조롱과 배신이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목을 조여왔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저려왔지만, 그녀는 애써 그 감정을 삼키며 자세를 곧게 세웠는데, 무너진 모습을 아버지에게조차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창밖으로는 겨울을 앞둔 정원의 나무들이 마른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고, 그 앙상한 풍경이 지금 자신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강서연은 씁쓸하게 입술을 다물었다. 달칵.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강 공작이 굳은 얼굴로 들어서고 있었는데, 평소라면 딸의 안색을 먼저 살피던 그가 오늘은 유난히 서두르는 기색으로 방을 가로질러 왔고, 그 손에는 낯선 봉인이 찍힌 서신 한 장이 들려 있어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대운제국에서 사절이 왔다." 짧은 한마디에 강서연은 순간 숨을 멈추었는데, 어젯밤 선우겸이 자신에게 건넨 말이 다시금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사치레라 여겼는데, 설마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구체적인 형태로 돌아올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서신을 펼친 강 공작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을 지켜보며 강서연은 그 내용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을 직감했고, 종이를 쥔 아버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 눈에 담으며 불안이 스멀스멀 차오르는 것을 느꼈는데, 마침내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대운제국이 너를 정책 담당자 겸 황비로 들이겠다는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서연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뒤엉키기 시작했는데, 정책 담당자라는 말이 붙은 것부터가 이 제안의 본질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대운제국이라 함은 이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대국으로, 광활한 영토와 막강한 군사력을 지녔으되 정작 내부의 행정 체계는 오래된 관습에 묶여 비효율적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나라였고, 그런 나라에서 굳이 타국의 여식을 황비로 삼겠다며 정책 담당자라는 직함까지 함께 얹어 보냈다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단순한 혼인이 아니라는 것을 뜻했다. '황비가 아니라, 도구가 필요한 거겠지.' 그런 확신이 들자 강서연은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데, 4년 동안 이하람의 이름 뒤에서 정무를 대행해온 자신의 능력이 이제는 다른 나라의 황실에서도 이용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거절하겠다고 답을 보내마." 강 공작이 서신을 접으며 단호하게 내뱉었지만, 강서연은 오히려 손을 뻗어 그 서신을 가로막았는데, 아버지의 얼굴에 스치는 당혹감을 보면서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버지, 제가 직접 만나보겠어요." "서연아, 지금 이 상황에서 굳이……" "어차피 이 저택에 계속 남아 있어도 제게 돌아올 것은 동정 어린 시선뿐이잖아요." 그 말에 강 공작은 잠시 말을 잃었고, 딸의 눈빛에 담긴 결의를 읽어낸 듯 결국 고개를 끄덕였는데, 강서연은 그 침묵 속에서 아버지 역시 자신과 같은 절박함을 느끼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날 오후, 강서연은 직접 대운제국 사절단이 머무는 별궁으로 향했는데, 마차가 별궁 앞에 멈춰서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다. '이건 굴욕적인 자리일 뿐이야. 그러니 흔들리지 마.'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별궁의 문턱을 넘어선 그녀를 맞이한 것은, 사절단의 대표로 나선 재상 하나와, 예상치 못하게 선우겸 본인이 자리하고 있는 응접실의 풍경이었다.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담담하게 건넨 말에 선우겸은 옅은 미소로 답했는데, 그 미소가 어젯밤 연회에서 보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훨씬 더 인간적인 온도를 담고 있어 강서연은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그는 창가에서 스며드는 오후의 빛을 등지고 앉아 있었는데, 검은 머리카락이 그 빛을 받아 잔잔한 윤기를 흘렸고, 짙은 눈동자는 마치 오래도록 다듬어진 흑요석처럼 서늘하면서도 그 안에 은은한 열기를 감추고 있는 듯 보여,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붙잡히고 말았다. "그대의 대답을 직접 듣고 싶었소." 그렇게 말하며 그가 서류 한 장을 그녀 앞으로 내밀었는데, 그 안에는 정책 담당자로서의 권한과 의무, 그리고 황비라는 지위가 뒤섞여 명시되어 있었고, 강서연은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점점 확신이 짙어졌다. 조항은 세세했다. 재정 정책에 대한 감사권, 지방 행정에 대한 개입 권한, 심지어 관료 인사에 대한 제한적 발언권까지 명시되어 있었으니, 이는 분명 정략혼이라기보다는 유능한 인재를 영입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이건 결혼이 아니라 계약이야.' 실제로 조항 하나하나가 마치 사업 계약서처럼 그녀의 능력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세부 사항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애정이나 신뢰를 전제로 한 문구는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심지어 후궁이나 후사에 대한 언급조차 지극히 형식적인 한 줄로 처리되어 있었다. 재상이 옆에서 헛기침을 하며 이 조건이 얼마나 파격적인지를 설명하려 했지만, 강서연의 귀에는 그 말들이 그저 형식적인 수식으로만 들려왔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조건은 저에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강서연이 서류를 살짝 밀어내며 건넨 말에 재상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선우겸은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소?" 그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되묻자, 강서연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서류의 한 조항을 손끝으로 짚었다. "권한은 나열되어 있지만, 그 권한을 뒷받침할 책임의 한계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저는 언제든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쓸 수 있는 자리에 놓이는 셈이지요." 그 말에 재상의 낯빛이 눈에 띄게 변했지만, 선우겸은 오히려 낮게 웃음을 흘렸는데, 그 웃음소리가 응접실의 정적을 가볍게 흔들어놓았다. "그럼 그대가 원하는 조건을 말해보시오." 예상 밖의 반응에 강서연은 잠시 말을 잃었는데, 지금까지 그녀가 상대해온 이하람이라면 결코 던지지 않았을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하람은 언제나 그녀의 제안을 자신의 성과로 가로채면서도, 그녀가 조건을 언급하는 순간에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던 남자였으니, 지금 이 순간의 낙차가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 사람은…… 다르구나.'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강서연은 자신이 지금 이 협상에서 처음으로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것이 비록 굴욕적인 거래에서 시작된 것이라 할지라도, 놓칠 수 없는 기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어 자신이 요구할 조항들을 하나씩 짚어나가기 시작했는데, 실패에 대한 책임의 명확한 한계, 정책 실행에 대한 독립적 권한, 그리고 언제든 이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조건까지 덧붙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선우겸은 그 모든 요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경청했는데, 그 눈빛에는 조롱이나 불쾌함 대신 순수한 흥미가 어려 있어, 강서연은 그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알 수 없는 이물감을 느끼고 말았다. "좋소. 그대가 말한 조건들, 다시 정리해서 가져오겠소." 재상이 놀란 얼굴로 선우겸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강서연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그 손끝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춰 서 있었다. "우리,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겠소?"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낯선 온도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으니, 강서연은 그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며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