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필명은 황제였다

5화

선우겸의 고백 이후, 강서연은 며칠 동안 별궁을 찾지 않았는데, 그것은 단순히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이 이 결혼을 받아들인다면 감당해야 할 것들의 무게를 냉정하게 재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강서연은 자신이 그동안 쌓아왔던 계산들이 하나둘씩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단지 감정에 휩쓸린 탓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도 선명한 균열이었다. '정책 담당자 겸 황비'라는 자리가 결국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굴욕적인 거래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선우겸이라는 인물과 나눈 대화들, 그리고 그가 다름 아닌 자신이 4년간 유일한 위안으로 삼았던 '설강'이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계산을 조금씩 흔들어 놓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편지 뭉치를 손끝으로 쓸어보던 강서연은, 그 종이들 사이에서 설강이라는 이름으로 오갔던 무수한 문장들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밤늦게 홀로 정책 초안을 써내려가며 지쳐 있을 때마다 그 이름으로 도착한 짧은 답장 하나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이제와 돌이켜보면 우스울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이건 그저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 그 문장을 끝맺지 못한 채, 강서연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지난 4년간 자신이 무엇을 위해 버텨왔는지를 되짚어보았는데, 그것은 언제나 누군가의 인정이었고, 자신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갈망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부정할 수 없었다. 이하람의 곁에서 정책을 대신 만들어주면서도 그 어떤 영광도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았던 시간들, 문서 말미에 이하람의 이름만 적혀나가고 자신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들을 떠올릴 때마다, 강서연은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고, 그럴 때마다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봐 준 것이 바로 설강, 그 얼굴 없는 벗이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 공작가로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이하람 왕세자의 실각이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집사가 조심스레 전한 그 말에 강서연은 잠시 손을 멈추었는데, 이하람이 그녀와의 혼약을 파기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정치적 입지가, 정작 대운제국과의 통상 조약 파기 논란과 겹쳐 국왕 이정헌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는 소식이었다. "자세히 말해보세요." 강서연이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집사는 잠시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대운제국 쪽에서 조약 조항 중 일부가 처음 합의된 내용과 다르다며 강하게 항의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왕세자께서 즉흥적으로 조건을 수정하신 것이 문제가 되었다고……" '그 조약이라면……' 순간 강서연은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이 밤을 새워 작성했던, 그러나 이하람의 이름으로 대운제국에 전달되었던 그 문서였고, 이하람이 그 문서의 세세한 조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즉흥적으로 조건을 수정한 것이 이번 논란의 발단이 되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었다. 그녀의 손끝이 문서를 매만지던 그 밤, 촛불이 다 타들어가도록 조항 하나하나를 검토하며 몇 번이고 고쳐 썼던 기억이 떠올랐고, 그 모든 노력이 결국 이하람의 손에서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씁쓸하게 다가왔다. "국왕 전하께서 왕세자의 정무 권한을 대폭 축소하시고, 새로운 후계 구도를 논의하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집사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강서연은 이상하게도 그 어떤 승리감도 느끼지 못했는데,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한 공허함이 스며들 뿐이었다. 한때는 이하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토록 애썼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런 노력이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실감하게 된 것이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정작 그의 실각 소식을 들은 지금, 강서연이 느끼는 것은 복수의 쾌감이 아니라 그저 허탈함뿐이었다. '나는 그냥…… 인정받고 싶었을 뿐인데.'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강서연의 방문 앞으로 다시 한 번 대운제국의 사절이 찾아왔다는 전언이 들려왔고, 이번에는 서신이 아니라 선우겸이 직접 청하국을 재차 방문했다는 소식이었다. 강서연은 그 전언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다듬었는데, 그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스스로 놀라며 '내가 왜 이러는 걸까' 하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응접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며, 강서연은 지난번 별궁에서 선우겸이 자신에게 고백했던 순간을 다시금 떠올렸는데, 그때 그의 목소리에 담겨 있던 흔들림과 진지함이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달칵. 응접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어선 선우겸의 얼굴에는, 지난번 별궁에서 보였던 흔들림 대신 단호한 결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느껴졌고,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강서연을 향해 곧게 뻗어오는 시선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담겨 있지 않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강서연의 가슴을 더욱 크게 뛰게 만들었다. "강서연." 처음으로 그가 영애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직접 부르는 순간, 강서연의 가슴이 크게 요동쳤는데, 그 짧은 부름 안에 담긴 무게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계약이 아니라, 청혼을 하러 왔소." 그 말에 강서연은 순간 숨을 멈추었고, 선우겸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지난번 내가 그대에게 했던 제안은, 정책 담당자라는 자리를 통해 그대의 능력을 청하국에서 대운제국으로 옮겨오려는 것이었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대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강서연은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는 그런 계산으로 그대를 설득하고 싶지 않소." "정책 담당자라는 자리는 그대의 능력을 위한 것이지만, 황비라는 자리는…… 내가 그대를 원해서요." 담담하지만 흔들림 없는 그 고백에 강서연은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무언가가 마침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굴욕적인 거래로 시작된 관계가 이제 전혀 다른 의미로 그녀 앞에 다시 놓이고 있다는 확신이었다. '설강, 당신이었어요……'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강서연은 지난 4년간 자신이 그 이름 뒤에서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는지, 그리고 그 위로를 준 사람이 바로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큰 무게로 다가오는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강서연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선우겸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그 얼굴에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결의와, 그럼에도 감추지 못한 초조함이 함께 담겨 있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침내 강서연이 그렇게 답하는 순간, 응접실 창밖으로 낮게 번개가 스치듯 빛났고, 그 빛이 사라지기 전에 저 멀리 왕궁 쪽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우르릉. 번개의 뒤를 따라 낮은 뇌명이 울려 퍼졌고, 그 소리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응접실 문 밖에서는 하인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이기 시작했다. "큰일 났습니다! 이하람 왕세자께서……!" 그 다급한 목소리가 채 문장을 끝맺기도 전에, 강서연과 선우겸의 시선이 동시에 창밖을 향했고, 두 사람 모두 이 혼인의 발표가 결코 조용히 지나가지 않을 것임을 예감할 수밖에 없었다. 강서연은 순간 손끝이 차갑게 굳어오는 것을 느꼈는데, 이하람이라는 이름이 다시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지난 몇 년간의 굴욕적인 시간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고, 동시에 방금 전 자신이 내린 결정이 그 모든 과거와 어떻게 맞물려갈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이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설마…….' 그 생각을 끝맺기도 전에, 응접실 문이 다시 한번 거세게 열렸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