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음 날 아침, 해가 채 뜨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몸은 여전히 뻐근했고 어제 폭발의 잔재로 눈썹 한쪽이 살짝 그슬려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그 초록 진흙 생각뿐이었으니까. 실패했다고, 완전히 망했다고 결론 내렸던 그 결과물을 그냥 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게임에서 재료를 아무 이유 없이 버리는 짓은 하수나 하는 짓이었고, 나는 적어도 이 판에서는 하수로 죽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병을 챙겼다. 어제 터진 초록 진흙, 정확히는 그 잔여물이 담긴 병을. 냄새는 여전히 고약했다. 상한 계란과 젖은 흙을 섞어놓은 것 같은, 코를 찌르는 악취였는데, 그마저도 어쩐지 정겹게 느껴진다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산 뒤편 개울가로 향했다. 씻어내려는 생각이었다. 병 안쪽에 눌어붙은 진흙 찌꺼기를 개울물로 헹궈서 재사용이라도 해보려 했던, 그야말로 별생각 없는 행동이었다.
문제는 그 별생각 없음이었다.
개울가 돌 틈에 붉게 자라난 이끼가 있었다. 물기를 머금고 미끈하게 반짝이는, 딱 봐도 흔한 잡초 같은 그것을. 나는 게임 도감의 기억을 뒤졌다. '녹혈이끼'. 하급 재료, 그것도 상점에서 몇 골드에 팔아치우는 잡템 취급이나 받던 그런 아이템이었다. 산성 계열 액체를 만들 때 촉매로나 쓰이던, 존재감 없는 재료.
나는 병을 개울물에 담그려다, 손이 미끄러졌다.
그냥 그뿐이었다. 발밑의 이끼 낀 돌에 살짝 미끄러진 것뿐이었는데, 병 안의 진흙 잔여물이 통째로 이끼 무더기 위로 쏟아져버렸다.
치이이익—
소리가 났다. 흰 연기가 순식간에 피어올랐다.
씨발.
머리가 새하얘졌다. 어제의 폭발이 눈앞에 겹쳐 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얼굴 앞에 세우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물러났다. 등에 닿은 축축한 흙바닥이 서늘했고, 심장은 마치 누가 꽉 움켜쥔 것처럼 철렁 내려앉았다. 폭발인가, 또 조졌나, 이번엔 얼마나 크게 터질까, 산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는 건 아닐까 하는,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인 생각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연기가 걷혔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자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놀랍도록 맑고 투명한 옅은 푸른색 액체가 이끼 사이에 고요히 고여 있는 모습이었다.
······뭐야, 이거.
게임 아이템 설명 그대로였다. '맑고 투명한 액체.' 정화수 물약의 기본 재료 상태를 설명할 때 나오던 그 문구가 그대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는 넋을 놓고 그 작은 웅덩이를 바라보았다. 손끝이 저절로 떨렸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는 데 몇 초쯤이나 걸렸다.
어제는, 정화수정과 은박초만으로 조합했다가 폭발이 났다. 재료 둘의 성질이 격렬하게 반발한 결과였다. 그런데 거기에 녹혈이끼의 산성 성분이 끼어들자, 오히려 그 반발이 상쇄되고 조합이 안정된 것이다.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줄 사이에 완충재가 끼어든 것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그 액체를 살짝 찍어 혀에 대보았다.
쓴맛이 아니었다. 옅게 박하 향이 도는, 맹물에 가까운 맛이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속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독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개운했다.
정말 우연일까?
나는 그 자리에서 몇 번이나 되짚어 생각했다. 손가락으로 흙바닥에 어제와 오늘의 재료 배합을 순서대로 그려가며, 하나씩 되짚었다. 정화수정, 은박초, 그리고 여기에 우연히 섞인 녹혈이끼. 게임 레시피는 언제나 '재료 A + 재료 B = 결과물 C'라는 지극히 단순한 등식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그 등식이 절대적이었다. 재료를 넣으면 결과가 나왔고, 실패란 존재하지 않았다. 조합창에 넣고 확인 버튼만 누르면 끝이었으니까.
그런데 여기는 달랐다.
현실에서는 재료 각각이 가진 화학적 성질, 습도, 산성도, 채취한 시기와 장소, 심지어 손이 미끄러진 그 우연한 순간까지도 그 등식에 끼어들고 있었다. 다시 말해, 게임 지식은 뼈대일 뿐이었다. 그 뼈대에 살을 붙이는 건 순전히 이 현실의 물성이었다.
그렇다면 어제의 실패는, 완전한 실패가 아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손을 떨며 개울물에 남은 녹혈이끼를 한 줌 더 뜯어 담았다. 손바닥에 붉은 즙이 묻어 미끈거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손가락 끝이 흥분으로 저릿저릿했다. 이건, 이건 진짜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게임 지식을 그대로 이 세계에 옮겨놓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게임 지식과 현실의 물성을 조합해야, 완전히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릿속으로 게임 레시피를 하나씩 다시 훑었다.
정화수 물약. 치유 연고. 해독제. 마력 회복 물약. 각각의 레시피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떠올리며, 이 현실 세계에서 그 재료들이 실제로 어떤 물성을 가질지 상상해보았다.
치유 연고에 들어가는 '백화초'는 게임에서는 그냥 흔한 채집 아이템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알칼리성이 강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산성 재료와 잘못 섞으면 오늘의 녹혈이끼처럼 안정될 수도, 아니면 어제의 폭발처럼 터질 수도 있었다. 마력 회복 물약에 들어가는 '월광석 분말'은 광물이니 아마 알갱이 형태의 불용성 물질일 것이다. 그걸 액체에 그냥 섞으면 가루가 가라앉아버릴 텐데, 게임에서는 그런 물리적 현상 따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어쩌면 게임에서 절대 조합되지 않던 재료 둘을 섞어야, 진짜 안정적인 결과물이 나올지도 몰랐다. 게임 속 정석 레시피가 오히려 현실에서는 최악의 조합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씨발, 이거 완전 다른 게임이잖아."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는데, 그 웃음 뒤에는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이 세계의 물성 법칙을 하나씩 실험해가며, 게임 지식이라는 지도를 이 현실의 땅에 맞게 새로 그려야 했다. 그건 막막한 일이었다. 게임 안에서는 몇 번을 실패해도 재료만 다시 사면 그만이었지만, 여기서는 실패 한 번에 손이 데거나 눈썹이 그슬리거나, 최악의 경우엔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다. 어제의 폭발이 조금만 더 컸다면, 지금 이렇게 앉아서 히죽거리고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동시에, 아무도 모르는 지도를 내가 처음으로 그릴 수 있다는 흥분이 함께 밀려왔다. 이 마을에서, 아니 어쩌면 이 세계 어디에서도, 게임 속 지식을 가진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으니까. 실패도 성공도 전부 내가 처음 겪는 데이터였다.
나는 병에 담긴 옅은 푸른 액체를 소중히 챙겨 들었다. 손이 떨려서 병을 두 번이나 놓칠 뻔했다. 조심조심, 마치 유리 세공품을 다루듯 병을 품에 안고 산을 내려왔다.
이제 확인해야 할 건 하나였다.
이 우연이, 재현 가능한 법칙인지. 아니면 그야말로 한 번뿐인 요행인지.
산길을 내려오면서 나는 계속 중얼거렸다. 다시 해보면 될 일이었다. 같은 비율로, 같은 조건으로. 하지만 그러려면 재료가 더 필요했다. 녹혈이끼도, 정화수정도, 은박초도. 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었지만, 매번 산 뒤편까지 몰래 숨어들어 실험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언젠가는 마을 사람 눈에 띌 게 뻔했다. 흰 연기가 산 뒤편에서 계속 피어오르는데, 그걸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답을 확인하기 전에, 나는 먼저 어머니에게 모든 걸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숨어서 실험할 수는 없었다. 산속에서 홀로 폭발을 일으키다가 언제 마을 사람들 눈에 띌지 모르는 일이었고, 만약 그 전에 정말로 큰 사고가 난다면, 나는 이 몸의 원래 주인에게도, 지금 나를 딸로 알고 있는 어머니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짐을 지우게 될 게 뻔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말을 고쳐가며 되뇌었다. 어머니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것부터가 두려웠다.
나는 아직 몰랐다. 그날 오후, 내가 어머니에게 입을 열기도 전에, 마을에 훨씬 더 급한 소식이 먼저 들이닥칠 거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