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강가의 저택은 무진문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었다. 한때는 남천성주의 위엄이 서려 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담벼락 곳곳이 허물어지고 마당의 정원수도 손질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강도현은 잡역각에서 몰래 시간을 내어 나선 길이었다. 반나절이라는 거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발바닥이 부르튼 지 오래였지만, 그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어머니가 걱정되어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요 며칠 잠자리에서도 뒤척이게 만드는 불안이 있었다. 정확히 무엇이라 짚어낼 수 없는, 등 뒤에 서린 냉기 같은 것이었다.
저택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강도현은 걸음을 멈췄다.
담벼락에 얹힌 기와 몇 장이 떨어져 나가 검은 구멍처럼 뚫려 있었다. 마당의 매화나무는 가지가 제멋대로 뻗어 담을 넘고 있었다. 예전, 아버지가 살아 있을 적에는 하인들이 아침마다 그 가지를 다듬었었다. 지금은 그런 손길이 닿을 리 없었다.
'2년이면 이렇게 되는구나.'
집 한 채가 무너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마당에 들어섰을 때, 낯선 마차가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은 칠이 잘 먹은 마차였다. 문짝에는 은사로 짜인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강도현은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설가의 문양이었다.
'설가에서 여기까지 왜···'
불길한 예감이 발끝부터 올라왔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서늘함이었다. 그는 걸음을 서둘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대청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뚜렷해졌다.
익숙한 목소리, 어머니 윤소영의 것이었다. 떨리는 음성이었다.
"그건 안 됩니다···"
"안 될 게 뭐가 있습니까."
또 다른 목소리, 설서리였다. 강도현은 문틀 옆에 몸을 붙였다. 숨을 죽이고 안을 살폈다.
설서리는 대청 한가운데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치 이 집이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여유로운 몸짓으로 찻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설가의 집사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서류 뭉치를 들고 서 있었다. 문서 위에는 붉은 인장이 여러 개 찍혀 있었다.
"남천성주의 자리는 명목상으로도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부인께서 계속 그 자리를 붙들고 계시면, 무진문에서도 곤란해집니다."
윤소영은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은 채 고개를 저었다. 손끝이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다.
"그 자리는 제 남편의 것입니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2년입니다."
설서리가 말을 끊었다.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탕.' 도자기가 나무 탁자에 부딪히는 짧은 소리였지만, 대청의 정적 속에서는 마치 종소리처럼 울렸다.
"2년이나 실종된 사람을 기다리는 건 미련일 뿐이지요. 게다가 이 저택도, 정확히는 무진문 소유의 부지 아닙니까. 성주가 돌아오지 않는 이상, 반환해야 합니다."
"이곳은···"
"부인께서도 아시잖습니까. 원래 이 저택은 남천성이 문파에 세운 공적으로 하사받은 것이지, 강씨 개인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요."
윤소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강도현은 문 안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주먹을 쥔 손에 손톱이 파고들었다.
지금 나선다고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 잡역 제자의 신분으로 설가의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참아야 한다···'
강도현은 숨을 삼켰다. 목구멍이 타는 듯 마른 느낌이었다.
"성주 자리를 포기하고, 이 저택에서 물러나 주십시오. 그것이 무진문과 설가 모두를 위한 길입니다."
설서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치 오늘 날씨를 이야기하듯 가벼웠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윤소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시선은 탁자 위, 집사가 내려놓은 서류에 고정되어 있었다.
집사가 손을 뻗어 서류 뭉치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
"여기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절차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윤소영은 그 종이를 만지지 않았다. 대신 목소리를 짜냈다.
"기한을 주십시오."
"보름이면 되겠지요."
"보름···"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이미 문파 내에서도 이 저택을 두고 말이 많습니다."
설서리는 부채를 펴 들었다. 천천히 흔들며 바람을 일으켰다. 대청의 공기가 서늘해지는 것이 문틀 옆에 서 있는 강도현에게까지 느껴졌다.
"게다가, 강씨 가문이 무슨 힘이 남아 있어 이 저택을 지키겠습니까. 남편은 실종되었고, 아들은 잡역 제자로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말에 강도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윤소영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반박을 하지 못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설서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자락을 정리하며 마당 쪽으로 걸어 나오던 그녀가, 문틀 옆에 서 있던 강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사이에 서늘한 공기가 흘렀다.
강도현은 순간 몸이 굳었다.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때마침 왔군요."
설서리는 옅게 웃었다. 조롱인지 인사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도 이제 이해하실 겁니다. 강씨 가문이 가진 건 다 사라졌다는 걸요."
강도현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아침에 보았던 그 이상한 기의 결이, 다시 그녀의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더 선명했다.
옷깃 사이로, 목덜미를 따라, 마치 서리가 앉듯 얇은 결이 스쳐 지나갔다.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문양이었다. 일반적인 내공의 흐름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였다.
'또···'
그는 이번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대신 낮게 물었다.
"보름 뒤에는요."
"그때도 저택에 남아 계신다면, 문파의 힘으로 강제 퇴거시킬 수밖에 없겠지요."
설서리의 대답에는 여지가 없었다. 협상이 아니라 통보였다.
강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삼켰다.
설서리는 마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탁.'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자 마차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대문을 빠져나갔다.
마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강도현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먼지가 가라앉는 것을 보면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그 기이한 기의 결만이 맴돌고 있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급히 대청으로 들어섰다.
"어머니."
윤소영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다. 별일 아니야."
"별일이 아니라니요. 지금 저택을 비우라고 하는데···"
강도현은 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힐끗 보았다. 붉은 인장이 눈에 박히듯 선명했다.
"네 아버지가 돌아오면 다 해결될 일이다."
윤소영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강도현은 그것을 느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마치 스스로를 다독이려는 사람의 것 같았다.
'2년째 소식이 없는데···'
그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마저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윤소영은 서류를 조심스레 접어 서랍에 넣었다. 그 손길이 마치 무언가를 봉인하듯 조심스러웠다.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요."
"네가 뭘 어떻게···"
윤소영은 말을 하다 멈췄다.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잡역 제자로 2년을 보낸 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무진문에서 잡역 제자란, 정식 제자의 시중을 들고 청소와 잡일을 도맡는 최하위 신분이었다. 무공을 배울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자리였다.
"오늘은 그냥 쉬어라. 얼굴이 왜 그러니."
윤소영이 손을 뻗어 아들의 뺨을 만지려 했다. 강도현은 살짝 몸을 뒤로 뺐다. 어머니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괜찮아요, 어머니."
강도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야간 작업이 있어서, 다시 돌아가야 해요."
"이 밤에도?"
"···네."
윤소영의 얼굴에 근심이 짙어졌지만, 아들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들의 옷깃을 정돈해 주었다. 손길이 짧고 서툴렀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무겁고 깊었다.
강도현은 짧게 인사를 건네고 저택을 나섰다.
대문을 나서기 전, 그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대청 문틀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하인들이 배웅을 나왔을 자리였는데, 지금은 어머니 혼자였다.
돌아가는 길,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뒤섞여 있었다. 보름이라는 시한, 어머니의 흔들리는 눈빛, 그리고 설서리의 몸을 타고 흐르던 그 이상한 기의 결.
'저건 대체 뭐였을까···'
내공의 흐름이라면 익숙했다. 무진문에서 2년을 보내며 온갖 문파 사람들의 기운을 곁눈질로 보아온 그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유파의 것과도 닮지 않았다. 마치 서리가 살아 움직이듯, 문양을 그리며 스치고 지나가는 결이었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였다. 보름 뒤,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
무진문 잡역각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밤길을 걷는 동안, 그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등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따라오는 기척은 없었다. 그저 어둠뿐이었다.
등 뒤로 저물어가는 저택의 지붕이, 어둠 속으로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잡역각의 문이 보일 때쯤, 강도현의 눈앞에 다시 그 서릿결이 스쳤다. 착각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의 예감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보름 뒤, 저 서릿결과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