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차인 영애들의 화려한 반란

2화

촛불이 반쯤 타들어 갔을 때, 나는 서윤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파기 안 된 혼약서를 들고, 뭘 어쩌겠다는 거야." "이걸로 우리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거지." "원하는 게 뭔데?" 서윤은 종이를 촛불 옆에 내려놓으며 나를 똑바로 보았다. "자유." 짧은 한마디였는데, 그 순간 나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자유라니. 그런 단어를 나는 육 년 동안 한 번도 입에 담아본 적이 없었다. 입에 담는 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했으니까. 궁에서 나 같은 처지의 여자가 할 수 있는 생각은 딱 두 가지였다. 오늘도 무사히 넘어갔다, 혹은 내일은 또 어떻게 버티지. 그 사이에 자유 같은 단어가 낄 자리는 없었다. "우리 지금까지 뭘 위해 살았지?" 서윤이 물었다. "정비가 되는 거……" "아니, 그건 명분이고. 실제론 뭐였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만 방 안에 가득했다. 서윤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다. 이 애는 궁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눈을 피한 적이 없었다. "살아남는 거였어. 은채 너나 나나." 그 말이 맞았다. 나는 친아버지가 누군지 이름은 기억하지만 얼굴은 가물가물했다. 몇 번이었던지도 헷갈렸다. 서 공작은 나를 궁으로 보낸 이후 편지 한 장 보낸 적이 없었다. 명절에도, 내 생일에도. 왕궁이 내게 유일한 거처였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건 생각보다 무서운 게 아니었다. 오히려 편했다. 기대할 게 없으니 실망할 것도 없었으니까. 서윤은 달랐다. 강 공작가라는 든든한 가문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 애는 육 년을 궁에서 나와 함께 갇혀 지냈다. 강 공작이 마음만 먹었으면 딸을 도로 데려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서 서윤은 한 번도 원망을 입에 담지 않았다. 대신 나를 붙잡고 버텼다. "이제 그 명분이 없어졌잖아." 서윤이 혼약서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종이가 낡아서 만질 때마다 바스락거렸다. "그러니까 우리도 이제 살아남는 방식을 바꿀 때야." 나는 그 애의 계획이 무엇인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두려움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촛불이 다 타서 심지가 지글거리는 소리가 났는데도,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 나는 이도현이다. 정비 책봉식 다음 날, 나는 서은채와 강서윤을 알현실로 불렀다. 어제의 발표에 대해 두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울음을 터뜨릴까. 항의를 할까. 아니면 침묵으로 버틸까. 여섯 해 동안 봐온 두 여자였다. 얌전하고, 말수가 적고, 시키는 일은 곧이곧대로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제의 결정에 대해서도 그저 형식적인 절차만 밟으면 될 거라 여겼다. 예상과 달리 두 사람은 정중히 예를 올렸을 뿐, 표정에 아무런 균열도 없었다. "어제 일에 대해 유감이 있나." 내가 먼저 물었다. 두 사람이 이 정도는 물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서은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의 뜻이라면 따를 뿐입니다." 너무 매끈한 대답이었다.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나는 잠시 그 얼굴을 살폈다. 눈동자가 흔들리지도, 입가가 떨리지도 않았다. 이상했다. "불편함은 없나." "없습니다." 강서윤이 이어 대답했다. "다만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봐." "혼약 소멸이 정식 절차를 거친 것인지요." 순간 나는 말을 잃었다. 그 부분을 미리 짚어낼 줄은 몰랐다. 이 자리에 앉은 그 누구도 여태껏 그런 걸 물은 적이 없었다. "절차는……" "법도상 정비 책봉이 새로 이루어지려면, 기존 혼약이 왕실 법전 3장 12조에 따라 정식으로 파기되어야 합니다. 어제 대전에서는 그 절차가 없었지요." 강서윤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미리 외워둔 문장을 읽듯 또렷했다. 나는 순간 이 두 사람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무너져 울거나 침묵으로 버틸 사람들이 아니었다. 육 년간 내가 봐온 얌전함이라는 것도, 아마 진짜 얼굴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 "문제는 아니지요. 다만 저희가 아직 전하의 혼약자라는 뜻이니까요." 대전이 조용해졌다. 시립한 내관들도 서로 눈치를 보며 숨을 죽였다. 나는 저 두 여자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냉정한 건지, 계산적인 건지. 혹은 둘 다인지. "원하는 게 뭐냐." 내가 결국 물었다. "백지화." 서은채가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를 완전히 자유롭게 해주십시오. 그게 저희가 원하는 전부입니다." 자유. 그 단어가 이상하게 낯설게 들렸다. 이 두 사람은 정비가 되지 못한 것에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자리를 걷어차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궁 안의 누구도 그 자리를 스스로 걷어찬 적이 없었다. 여자들은 그 자리를 얻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었지, 벗어나려 하지는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서은채는 담담했고, 강서윤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웃고 있다니, 이 상황에서.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계략이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잠시 경계심을 세웠지만, 곧 그럴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이 둘에게는 이제 아무 권한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혼약자라는 이름 하나 남았을 뿐, 궁 안에서 두 사람이 부릴 수 있는 힘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해 보겠다." 나는 그렇게만 답하고 자리를 떴다. 등 뒤로 두 여자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신경에 오래 남았다. · 나는 서은채다. 알현실을 나서면서 서윤이 내 팔을 슬쩍 붙잡았다. "봤지, 저 표정." "응." "저 사람, 우리가 뭘 원하는지 전혀 몰라." 서윤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여 있었다. 복도를 걸으면서도 그 애는 자꾸 뒤를 힐끔거렸다. 마치 방금 자기가 던진 패가 얼마나 잘 먹혔는지 확인하고 싶은 사람처럼. "그러니까 이제부터가 재밌어지는 거야." 나는 그 애의 손을 잡았다. 육 년 만에 처음으로, 이 궁 안에서 무언가를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감각이 온몸을 채웠다. 발끝부터 이상하게 저릿한 느낌이었다. 겁이 나서 저린 건지, 다른 이유인지는 아직 나도 몰랐다. "근데 저 사람이 백지화를 순순히 해줄까?" "안 해주면." 서윤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안 해줄 수 없게 만들면 되지." 그 말을 하는 서윤의 눈이 반짝였다. 순간 나는 이 계획이 결코 순탄하게 끝나지 않을 것을 예감했다. 서윤이 저런 눈으로 웃을 때는 늘 뭔가 크게 벌이려는 순간이었다. 육 년 동안 봐온 표정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궁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다음이 기대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이 애가 무슨 카드를 또 숨기고 있을까. 나는 서윤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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