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차인 영애들의 화려한 반란

3화

다음 날 아침, 나는 서윤과 함께 다시 알현실 앞에 섰다.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볕이 뜨거웠다. 대전으로 이어지는 회랑을 걷는 동안 나는 발밑에서 부서지는 자갈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어제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내관이 우리를 안으로 들이며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평소 같으면 우리 쪽을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이 오늘은 자꾸 눈을 마주쳤다가 피했다. 뭔가 있구나, 싶었다. 아마 밤새 대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도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어제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어제는 짜증과 곤란함이 뒤섞인 표정이었는데, 오늘은 그보다 더 복잡한 감정이 얼굴 위에 겹겹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밤새 알아보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지만, 그 힘이 자신감보다는 억지로 짜낸 위엄에 가깝다는 걸 나는 눈치챘다. "두 사람 말이 맞더군. 혼약이 정식으로 파기되지 않았어." "그러시군요." 서윤이 담담하게 답했다. 놀란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야 당연했다. 우리가 이미 밤새 확인하고 온 사실을 왕태자가 이제 와서 확인해준 것뿐이니까. "해서, 절차를 밟아 정식으로 파기하겠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삼켰다. 됐다, 여기까지가 우리의 계획이었으니까. 하지만 서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이도현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실렸다. 그는 팔짱을 끼며 몸을 뒤로 살짝 젖혔다. 방어적인 자세였다. "저희가 파기에 동의하는 대신, 왕실 재산 목록에서 저희 몫으로 배정된 혼수와 지참 예산을 그대로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순간 알현실에 정적이 흘렀다. 혼수와 지참 예산이라니. 나조차 조금 놀랐다. 이 상황에서 재산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이도현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그건……" "전하의 명으로 소멸된 혼약이니, 그 책임은 저희에게 있지 않습니다. 저희가 부담해야 할 손해도 아니지요." 서윤의 목소리는 조금도 떨림이 없었다. 오히려 또박또박, 법전을 읊는 것처럼 정확했다. 나는 그 옆에서 속으로 감탄했다. 이 애는 정말이지, 무너지는 순간에도 뭔가를 챙길 줄 안다. 육 년 동안 정혼자 자리에 매달려 있으면서 이렇게 냉정하게 셈을 할 수 있다니. 나였으면 그냥 안도하는 데서 끝났을 텐데. 이도현은 한참 말이 없었다. 시선이 서윤에게서 나에게로, 다시 서윤에게로 옮겨갔다. 뭔가 계산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다 낮게 중얼거렸다. "가면을 쓴 여자들이군." 서윤도, 나도 그 말에 아무 대응을 하지 않았다. 가면이라니. 육 년을 버틴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굳이 반박할 가치도 없었다. 저 사람 눈에는 침착한 태도가 곧 가면인 모양이지. 그럼 매일같이 화만 내는 저 얼굴은 뭐라고 불러야 하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조금 웃었다. "좋다. 그렇게 하지." 그가 결국 승낙했다. 서윤이 짧게 예를 올렸다. 나도 뒤따라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됐다. 이제 진짜 끝이다. · 소식은 그날 오후 늦게 강 공작가에 닿았다. 강태호 공작이 마차를 대기시켰다는 말을 들은 건, 우리가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옷가지를 상자에 담다가 손을 멈췄다. "공작님이 오신다고?" 내가 서윤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딸이 정비 자리를 놓쳤는데, 게다가 그 뒷수습을 자기가 몰랐다는 걸 알면 뒤집어질 사람이야." 서윤의 목소리에는 걱정보다 예상이라는 투가 섞여 있었다. 마치 오늘 저녁 반찬을 예상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나는 그 여유가 신기하면서도 조금은 안심이 됐다. 이 애가 이렇게 태연하니 나도 덩달아 태연해질 수 있었다. "그래도 걱정 안 돼?" "뭘 걱정해. 아버지가 나 편이든 재산 편이든, 어차피 우리한테 나쁠 건 없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강태호 공작이 왕궁 정문을 통과했다는 전언이 왔다. 그리고 그가 대전 근처에 도착했을 즈음, 궁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내 딸의 혼약이 정식 절차 없이 파기됐다는 게 사실인가!"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대전 벽을 뚫을 듯했다. 걸음마다 바닥이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서윤과 함께 그 방향으로 걸어갔다. 강태호 공작은 이도현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었다. "전하, 소인은 지금까지 왕태자궁의 모든 재정을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통보도 없이 처리하시다니요." "이미 두 사람과 합의를 마쳤소." 이도현이 답했다. 담담한 척했지만 목소리 끝이 조금 흔들렸다. "합의라니, 제 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요?" "아버지." 서윤이 앞으로 나서며 그를 불렀다. 강태호 공작의 시선이 즉시 딸에게로 옮겨졌다. 화가 나 있으면서도, 그 시선에는 딸을 향한 걱정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보며 잠깐 낯선 기분이 들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제가 이미 조건을 걸고 동의했습니다." "조건이라니, 무슨." 서윤이 짧게 설명했다. 혼수와 지참 예산을 그대로 받게 되었다는 것. 공작의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바뀌었다. 화가 가라앉는 게 아니라, 다른 종류의 계산이 시작된 얼굴이었다. 눈동자가 재빠르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아마 머릿속으로 숫자를 굴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건 잘했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 반응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역시 상인 출신 귀족은 다르구나. 딸의 혼사가 깨졌다는 소식보다 재산 목록이 먼저 눈에 들어오다니. 하지만 강태호는 곧 다시 이도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 목소리에는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전하, 이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정식으로 왕실 감사원에 이 사안을 제기할 것입니다." "감사원까지 갈 필요는 없소."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제가 판단합니다." 공작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이도현은 그 눈빛을 피하듯 시선을 돌렸다. 대전 안에는 이제 감시자로 보이는 관료 몇이 서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경계심이 뒤섞여 있었다. 아마 이 소란이 며칠 안에 궁 전체에 퍼질 이야깃거리가 되겠지. 나는 서윤과 눈을 마주쳤다. 이 소란이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감사원이 나서서 이 일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이도현 쪽의 잘못만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그날 밤, 왕실 감시자들이 우리 처소 앞에 배치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감시자라니, 무슨 대단한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처소 문을 열자 복도 끝에 낯선 얼굴 둘이 나란히 서 있는 게 보였다. 등불 아래서도 표정이 딱딱했다. 서윤은 그 소식을 듣고도 태연히 차를 마셨다. 찻잔을 든 손끝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기록될 거야." "괜찮아?" "괜찮지. 우린 숨길 게 없으니까." 그 말을 하는 서윤의 눈빛이 이상하게 반짝였다. 등불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숨길 게 없다는 말과, 그 눈빛 사이의 간극이 나를 조금 불안하게 만들었다. 정말 숨길 게 없는 걸까. 나는 찻잔을 내려놓는 서윤의 손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손끝이 아까보다 조금 더 오래 잔 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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