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차인 영애들의 화려한 반란

5화

왕실 게시판의 소문은 사흘째 되던 날까지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살이 붙었다. 처음에는 그냥 "강 공작가와 왕태자궁 사이에 뭔가 있다더라" 정도의 애매한 이야기였는데, 이틀이 지나자 우리가 강태호 공작가의 재산을 노려 왕태자를 협박했다는 구체적인 시나리오로 바뀌어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에는 아예 소설이 되어 있었다. 정비 자리를 빼앗겨서 앙심을 품은 서은채가, 강씨 가문의 힘을 등에 업고 왕실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읽으면서 진짜 헛웃음이 나왔다. 정작 왕궁을 나가고 싶어 안달인 사람이 왕궁을 무너뜨리려 한다니. 이 정도면 소문 만든 사람이 나보다 나를 더 모른다는 소리 아닌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와." 서윤이 소문지를 손에 든 채 미간을 좁혔다. 종이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거, 우리가 대응하지 않으면 계속 커질 거야. 지금도 이 정도인데, 다음 주쯤엔 또 뭐가 붙어 있을지 몰라." "대응이라니, 어떻게? 우리가 게시판에 반박문이라도 붙여?" "공작가의 힘을 빌리는 거지. 이런 건 개인이 상대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야." 서윤의 말투가 평소보다 딱딱했다. 얼굴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날 오후, 강태호 공작이 다시 왕궁을 찾았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격노한 얼굴이 아니었다. 사업가답게 차분한 표정, 하지만 그 차분함 아래 뭔가 벼르고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이 소문의 출처를 알아냈습니다." 공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 감정을 싣지 않으려는 듯한 절제가 느껴졌다. "왕태자궁 소속 궁녀 몇이 관여했더군요. 소문지를 퍼뜨린 경로를 추적하니 거기서 시작됐습니다. 그 위에 누가 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지만." "궁녀들이 자발적으로 이런 소문을 냈을까요." 서윤이 물었다. 목소리에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투가 섞여 있었다. "그럴 리 없지. 이건 조직적으로 움직인 거다. 소문지가 퍼진 시점, 내용의 정교함, 그리고 하필 지금 이 시점에 터진 것까지.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딱 맞아 들어가." 공작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손끝으로 탁자를 한 번 두드리는 것이, 마치 화를 억누르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누군가 너희 둘을 궁에서 나쁜 평판을 안고 쫓아내려는 것 같구나. 그냥 나가는 것도 아니고, 죄인처럼 만들어서." 나는 순간 며칠 전 다연이 전해준 한소영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자작 지위를 급하게 받았다는 것. 원래대로라면 몇 년은 걸려야 할 절차가 순식간에 처리됐다는 것. 그리고 우리를 향한 이 조직적인 흠집 내기. 둘 사이에 연결점이 있을 것 같은데,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퍼즐 조각만 흘려두고, 그림은 알아서 맞춰보라는 것처럼. "아버지, 이 일을 우리가 직접 캐낼 수 있을까요." 서윤이 물었다. 눈빛에 이미 결심이 서 있었다. "위험할 수 있다. 상대가 누군지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움직이는 건 늘 위험해. 하지만 너희가 원한다면, 도와주지."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끄덕임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안심이 됐다. 적어도 이 사람은, 우리 편이구나. · 나는 이도현이다. 서은채와 강서윤을 둘러싼 소문이 커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건 그날 저녁이었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궁을 떠날 사람들이니, 소문 따위야 그들의 몫이라고. 어차피 나가면 그만인 소음이라 여겼다. 그런데 한지훈이 그 이야기를 듣고 웃음을 흘렸다. 보고서를 넘겨보다 나온 그 웃음이, 이상하게 걸렸다. "차라리 잘된 일이지요, 전하." "무슨 뜻이냐." "그 두 사람이 궁을 나가면, 소영이 자리를 잡는 데 방해될 게 없어지니까요." 나는 그 말에 순간 미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지훈의 말투가 너무 태연했다. "방해라니, 그들이 뭘 방해했다는 거냐." "전하께서 소영을 정비로 세우신 걸 두고, 궁 안에서 곱게 보지 않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서은채와 강서윤 두 사람이 그 여론을 자극할 수도 있었지요. 두 사람 다 궁 안에서 평판이 좋았으니까요." "그들이 그런 일을 했다는 증거가 있느냐." "아직은 없습니다만……" 한지훈은 말끝을 흐리며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평소 지훈이 웃을 때와는 결이 달랐다. 나는 그를 오랫동안 신뢰해 왔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유일한 친우였으니까. 궁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지훈은 유일하게 격식 없이 말을 섞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처음으로 그의 웃음 뒤에 뭔가 다른 것이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저 녀석은. 증거도 없이 남을 의심하는 말을 저렇게 태연하게 하는 사람이었던가.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 못 보고 지나쳤던 건가. 나는 그 생각을 곧 지워버렸다. 지훈이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릴 때부터 봐온 녀석이다. 내가 못 알아볼 리 없다. 그렇게 되뇌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은 찜찜함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 나는 서은채다. 며칠 뒤, 나는 강혜원 부인의 초대로 강 공작가에 처음 발을 들였다. 서윤과 함께였다.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이제 곧 이곳이 내 집이 될 거라는 사실이, 아직도 낯설게 느껴졌다. 공작가의 대문을 지나 정원을 걸을 때, 서윤이 슬쩍 내 손을 잡았다. 긴장하지 말라는 뜻이었을까. "이 방을 네게 주고 싶었단다." 부인이 넓은 방문을 열어주었다. 방 안에는 이미 몇 가지 가구가 들어와 있었다. 창가에 놓인 책상, 침대 위에 정리된 이불, 벽에 걸린 작은 그림 하나까지. "제 걸 이렇게 미리……" "당연하지, 네가 곧 우리 딸이 될 거니까." 부인의 말에 나는 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육 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준다는 사실이 낯설고도 따뜻했다. 궁에 있던 육 년 동안, 나를 위한 방이라는 게 있었던가. 있었지만 그건 정비가 되기 위한 방이었지, 나를 위한 방은 아니었다. 서윤이 옆에서 씩 웃었다. "이제 진짜 자매네." "그러네." 나도 웃었다. 웃음이 자연스럽게 나온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그날 밤, 서윤과 나는 방 안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아,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왕궁을 완전히 나가면, 뭘 하고 싶어?" 서윤이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육 년을 오직 정비가 되기 위한 삶을 살았기에, 정작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육 년 동안 매일 뭔가를 위해 살았으면서, 정작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몰랐다. "글쎄……" "난 옷을 만들고 싶어." 서윤이 불쑥 말했다. 눈이 이미 반짝이고 있었다. "옷?" "궁에서 입던 그 딱딱한 드레스들 말고, 진짜 우리가 입고 싶은 걸. 움직이기 편하고, 예쁘고. 그런 걸 만들어서 팔면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나는 그 말에 처음으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거, 진짜 재밌을 것 같은데. 나도 옆에서 도울게." 서윤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우리, 그거 하자. 진짜로." 그 순간만큼은, 소문이나 감시자나 한소영에 대한 의심 같은 걱정들이 다 저 멀리 밀려나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런 미래가 올 것처럼. 우리 둘이서, 그냥 평범하게, 뭔가를 만들면서 사는 그런 삶이. 하지만 다음 날, 다연이 또 다른 소식을 들고 왔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부터 다급했다. "아가씨, 한지훈 님이 오늘 아침 궁내 감사원에 서류를 제출했대요. 두 분에 대한 정식 조사를 요청하는 서류라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서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옷 이야기를 하며 웃던 그 얼굴이, 어느새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처럼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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