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야만족 백작과 결혼하라니

3화

알현실은 서늘했다. 대리석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무릎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고, 나는 그 냉기를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변에는 대신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내 등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호기심과 경멸, 그리고 몇몇은 순수한 즐거움이 섞인 눈빛이었다. '구경거리가 됐구나.'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 익숙하지.' 국왕은 생각보다 젊었다. 삼십 대 후반쯤 되는 나이에, 흰머리가 관자놀이에 몇 가닥 섞인 정도였다. 앉은 자세는 곧았고, 목소리에는 위엄보다는 피로가 먼저 묻어났다. "서다은." 국왕이 낮게 말했다. "왕자를 폭행한 죄는 무겁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나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었다.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다들 내가 변명이나 애원을 시작할 거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폭행에 대해서는 벌을 받겠습니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다만 한 가지, 청원이 있습니다." 대신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벌을 순순히 받겠다는 말에 놀란 건지, 뒤이은 청원이라는 단어에 놀란 건지 알 수 없었다. "청원?" "제 형벌을 감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죄를 갚고 싶습니다." 국왕은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이 꽤 길게 이어졌다. 마치 내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내려는 사람처럼. "이번 전쟁에서 자네가 세운 공을 짐도 알고 있다." 국왕이 말했다. "전장 보고서에는 자네의 이름이 스물세 번이나 언급되었지. 그런데 발표 자리에서는 한 번도 불리지 않더군." 나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스물세 번. 정확한 숫자였다. 누군가가 보고서를 꼼꼼히 세어 봤다는 뜻이었고, 그게 국왕 본인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알고 있었구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헌의 발표를 막지 않았다는 건, 뭔가 다른 계산이 있었다는 뜻이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셨다면."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왜 막지 않으셨습니까." "왕자의 체면도 왕실의 체면이다." 국왕이 짧게 답했다. "대신 짐이 다른 방식으로 균형을 맞추려 한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균형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국왕이 균형을 맞춘다는 건, 보통 누군가에게는 손해가, 누군가에게는 이득이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그 손해가 나는 아니길 바라야겠지.' "흑산으로의 결혼은 이미 발표된 사안이라 되돌릴 수 없다." 국왕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짐은 자네에게 자작의 작위를 내리고, 홍옥령 영지를 하사하겠다." 순간 알현실이 조용해졌다. 너무 조용해서, 누군가의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대신들의 표정을 살폈다. 다들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폭행죄로 끌려온 사람에게 작위와 영지를 준다니, 그들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을 것이다. '홍옥령이라니.' 나는 머릿속으로 지도를 떠올렸다. 흑산 인근의 작은 영지였다. 자원은 부족하지만,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완전한 미개척지. 전에 지리 수업에서 흘려들었던 기억이 났다. 홍옥령은 지도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만큼 관심 밖의 땅이라는 뜻이었다. "그곳은 황폐한 땅이다." 국왕이 덧붙였다. "마수가 자주 출몰하고, 정령이 그 땅을 외면한다는 소문도 있다. 그러니 대신 자네에게 자치권을 최대한 보장하겠다.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그곳을 자네 뜻대로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이 돌았다. 마수와 정령 이야기는 위협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그 땅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감시자도 없고, 참견하는 사람도 없다는 의미. '감형을 청원했는데, 작위와 영지가 돌아왔다.' 나는 그 낙차를 이해하려 애썼다. '이건 벌인가, 상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국왕 본인도 정확히 어느 쪽인지 구분하지 않고 던진 말일 수도 있었다. "받겠습니다." 나는 결국 그렇게 답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했지만, 사실은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는다는 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사제로 살면서 늘 누군가의 명령 아래 있었던 나에게는, 그 한 문장이 무엇보다 값어치가 있었다. 국왕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한 가지 더." 국왕이 말했다. "도하준 백작에게는 이미 결혼 명령이 전해졌다. 그는 벌써 세 번이나 정략혼에서 상대를 잃었지. 이번에는 자네가 그를 상대해야 한다." "세 번이나요?" 나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목소리가 조금 커졌던 것 같다. 대신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첫 번째는 도망쳤고, 두 번째는 파혼을 요청했고, 세 번째는… 알아서 짐작하게." 국왕의 표정이 묘하게 흐려졌다. 세 번째 이야기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좋은 정보는 아니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었다. 도망친 상대, 파혼을 요청한 상대, 그리고 짐작만 해야 하는 세 번째 상대. 셋 다 도하준 백작과 오래 버티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만나보면 알겠지.' 알현이 끝난 뒤, 나는 위임장 한 장을 받았다. 국왕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홍옥령의 영주로서 나의 권한을 명시하는 문서였다. 문서를 건네준 관리는 표정 관리를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마치 폭탄을 넘겨주는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영지에 관한 세부 사항은 별도로 전달될 것입니다." 관리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자작님." 자작님. 그 호칭이 아직도 낯설었다. '이걸 잘 챙겨야겠다.' 나는 문서를 품에 넣으며 생각했다. '어디선가 요긴하게 쓰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왕궁을 나서며 나는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다. 사제복 대신 여행용 로브를 걸치고, 검을 허리에 차고, 최소한의 짐만 꾸렸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거리의 상인들이 나를 알아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폭행죄를 저지른 성녀, 그런데 작위를 받았다는 성녀. 소문은 벌써 왕궁 밖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곧 떠날 곳이었다. 출발 전날 밤, 나는 위임장을 다시 펼쳐보았다. 종이의 질감이 유독 두꺼웠고, 인장의 붉은빛이 등불 아래서 반짝였다. 글자 하나하나를 다시 읽었다. 자작 서다은. 홍옥령의 영주. 자치권 보장. '이게 나를 지켜줄 유일한 무기가 되겠지.' 동시에 도하준 백작이라는 이름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세 번의 실패한 정략혼. 그중 세 번째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국왕의 말. '흑산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그자에 대해 알아봐야겠다.' 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검, 최소한의 옷가지, 그리고 위임장. 이게 내가 새로운 삶으로 가져가는 전부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흑산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마차 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홍옥령도, 도하준 백작도, 뭔가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곳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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