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결혼식 날짜가 석 달 앞으로 다가온 어느 오후, 강윤재가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부터 뭔가 이상했다. 평소엔 노크를 세 번 하고, 대답을 듣고서야 문을 여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노크가 두 번이었다. 한 번이 빠졌다.
그리고 표정.
평소라면 나를 보고 웃었을 텐데, 오늘은 입꼬리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웃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얼굴 전체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지안 님." 그가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도자기가 받침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손끝이 떨리지 않았다는 게 나중에 생각해도 신기했다. 삼 년을 사귄 남자 앞에서 이 정도로 침착할 수 있다는 게, 그게 더 이상했다.
"말씀하세요."
그는 잠깐 숨을 골랐다. 그 짧은 정적 동안 나는 별생각을 다 했다. 결혼식 장소가 바뀌었나. 예산 문제인가. 아니면 신혼집 계약에 문제가 생겼나.
"혼약을 해제하고 싶습니다."
와.
세 달 뒤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던 남자가, 지금 나에게, 이렇게, 아무 예고도 없이. 청첩장은 절반이나 나갔고, 드레스 숍에서는 마지막 피팅 일정을 잡아둔 상태였는데. 이 남자는 그런 걸 하나도 신경 안 쓰는 표정으로 저 말을 뱉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은 것도 나중에 생각하면 기적이었다.
그는 시선을 살짝 내렸다. 그러다 다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세은 양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세은. 도세은. 내 이복 여동생. 나보다 딱 삼 개월 늦게 태어난, 계모 윤서인의 친딸.
머릿속에서 뭔가가 잠깐 정지했다가, 다시 느리게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컴퓨터가 다운되기 직전에 화면이 살짝 멈추는 것처럼.
"세은이요." 나는 그 이름을 그대로 따라 했다. 되뇌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나 보다. 안 달라졌다. 이름은 여전히 도세은이었고, 상황도 여전히 최악이었다.
"처음엔 저도 몰랐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진심. 그 단어가 참 우습게 들렸다. 삼 년을 만난 나와의 시간은 뭐였을까. 그것도 진심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냥 습관이었을까. 아침마다 보내던 문자, 생일마다 챙기던 선물,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온다며 긴장한 얼굴로 이 응접실 앞에 서 있던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윤재 님." 나는 그를 불렀다. 예전처럼 다정하게는 아니고, 그냥 사실 확인을 위해서.
"네."
"저와 세은이는 얼굴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데, 대체 뭐가 헷갈리셨어요?"
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게 좀 웃겼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웃을 처지는 아니었는데도, 저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나올 뻔했다. 사람이 이렇게 궁지에 몰리면 이상한 데서 유머를 찾게 되나 보다.
"그런 뜻이 아니라..."
"알아요. 압니다. 그냥 물어본 거예요."
"지안 님, 저도 이게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고민했고—"
"오랫동안이요? 얼마나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 침묵을 답으로 받아들였다. 굳이 숫자를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마 내가 웨딩드레스 카탈로그를 보며 어떤 레이스가 더 예쁜지 고민하던 그 시간에, 이 남자는 다른 여자를 보며 확신을 다졌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걷는 데는 문제없었다. 문 앞에서 그를 돌아봤다.
"그럼 이제 저는 뭐가 되는 건가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하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해온 사람이 세상에 있을 리가. 아마 저 사람은 오늘 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 나에게 파혼을 통보하는 그 순간까지만 대본을 짜뒀을 것이다. 그다음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문을 닫고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결혼식 청첩장은 이미 절반이나 돌린 상태였다. 드레스는 마지막 피팅만 남겨두고 있었다. 예식장 계약금도 이미 다 넣은 상태였고, 신혼여행지로 유럽 어딘가를 알아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통보를 받는다.
인생, 참.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눈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안 나왔다. 대신 뭔가 다른 감정이 뱃속에서 뭉쳐 올라왔다. 분노인지 허탈함인지 구분이 안 됐다. 화가 나는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닌, 그냥 속이 텅 빈 느낌.
창밖으로 정원이 보였다. 세은이 좋아하던 장미덩굴이 담벼락을 따라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저 장미도 원래는 내가 심은 거였다. 어릴 때 정원사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직접 흙을 만지고 물을 줬던 기억이 났다. 근데 세은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다들 세은 것처럼 부르고 다녔다. "세은 아가씨의 장미"라고.
그러고 보니 이 집안에서 원래 내 것이었던 게 뭐가 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났다. 방도, 정원도, 심지어 약혼자도. 다 어느 순간엔가 세은의 것이 되어 있거나, 될 예정이었다.
하녀가 문을 두드리며 저녁 식사가 준비됐다고 알렸다. 나는 대답 없이 침대에 누웠다. 천장의 무늬를 눈으로 따라가며 오늘 벌어진 일을 다시 정리해봤다.
윤재가 세은을 사랑한다. 혼약은 해제된다. 나는 버려진다.
간단하게 요약하니 더 잔인하게 들렸다. 세 줄로 정리되는 인생이라니. 삼 년이라는 시간이 저렇게 세 문장으로 축소될 수 있다는 게 허무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오늘 밤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서히 눈이 감기더니 진짜로 잠이 들어버렸다. 몸이 마음보다 더 지쳐 있었나 보다. 사람이 충격을 받으면 오히려 잠이 잘 온다던데, 그 말이 맞았다.
다음날 아침,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에 눈을 떴다. 어젯밤의 충격이 꿈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몸이 먼저 그게 현실이었다는 걸 알려주었다. 온몸이 뻐근했다. 마음도 그만큼 뻐근했다. 마치 밤새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내린 것처럼.
씻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어제 그 장면이 재생됐다. 강윤재의 굳은 얼굴, 그의 목소리, 그리고 "세은 양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라는 그 한 문장.
식당으로 내려가니 아버지 도경환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신문을 보는 척하며 나를 힐끗 쳐다봤다.
"들었다." 그가 말했다. 짧게, 무심하게.
"그러시겠죠." 나도 짧게 대답했다.
"윤재 그놈, 원래 눈이 좀 낮았어."
그건 위로인가, 아니면 그냥 세은을 낮춰 부르는 표현인가. 애매했다. 아버지는 원래 애매한 사람이었다. 평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온 사람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물었다.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뭘."
"이 상황을요."
그는 신문을 넘기며 대답했다.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할 거라고 생각한다."
알아서 잘 처리할 거라고. 그 말이 참 편리했다. 자식이 파혼을 당했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저것뿐이라는 게.
식사 내내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세은과 계모 윤서인은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도 판단이 안 됐다. 만약 저 두 사람이 지금 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했을지, 상상만 해도 골이 아팠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 복도 창문 너머로 마당에서 세은이 정원사와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참 편안해 보였다. 어제 남의 약혼자를 빼앗은 사람이 저렇게 편안할 수 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미안함이나 죄책감 같은 건 그 얼굴에서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뭐,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등을 문에 기댄 채 잠시 서 있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생각이 처음으로 진짜로 들었다.
이 집에서 내가 지킬 수 있는 게 뭐가 남았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