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날 아침, 나는 결심을 굳혔다.
방문을 나서기 전, 거울 앞에 섰다. 머리카락은 어제 감은 그대로였는데도 괜히 손으로 한 번 쓸어 넘겼다. 이런 날은 뭔가 의식이라도 치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드라마에서 보면 결심한 주인공은 항상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던데, 나도 그 클리셰를 충실히 따랐다.
피곤해 보였다. 어젯밤에 거의 못 잤으니까. 그런데 눈빛만은 이상하게 또렷했다.
이건 뭐지.
어제까지의 나와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었다. 뭔가 결정을 내린 사람의 눈빛이랄까. 아니면 그냥 다크서클이 너무 심해서 눈이 더 형광등처럼 반짝이는 걸 수도 있고.
식당으로 내려가니 아버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신문을 펼쳐 든 채였다. 저 신문, 매일 아침 저렇게 펼쳐 들고 있는데 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읽는 건지 궁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은 그런 잡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곧장 그의 앞에 섰다.
"아버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냐."
"선우 가문과의 혼약,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표정에 잠시 놀란 기색이 스쳤다. 딱 반 박자였다. 그 반 박자 동안 나는 그의 얼굴에서 여러 가지를 읽었다. 의외라는 표정,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안도. 아마 내가 울고 매달리거나, 아니면 반발하며 방문을 걸어 잠글 거라고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잘 생각했다." 그가 말했다. "어차피 정해진 일이었으니까."
어차피 정해진 일.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속으로는 조금 웃겼다. 정해진 일이라니. 누가 정했는데. 내가 정했나. 아니었다. 그런데도 결국 이렇게 정해진 대로 굴러가는 걸 보면, 이 집안에서 내 의지가 끼어들 자리는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 아버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한 뼘쯤 올라간 눈썹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카운트를 셌다. 하나, 둘. 저 사람이 저렇게 눈썹을 올리는 건 화가 났다는 뜻이 아니라 순수하게 놀랐다는 뜻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이 집에서 십몇 년을 살다 보면 그 정도 표정 사전은 자연스럽게 외워진다.
"이 혼약은 제가 스스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도림 백작가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 자신을 위해서요."
"그게 무슨 차이냐."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선우 가문에 가는 순간부터, 저는 더 이상 도림 백작가의 딸이 아니라 선우 가문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저에게 뭔가를 바라지 마세요."
아버지가 잠시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이 꽤 길었다.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이 살짝 벌어졌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정적. 식당 벽에 걸린 시계 소리만 들렸다.
"마음대로 해라." 그가 신문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마음대로 해라. 이 말도 참 오랜만에 듣는다. 어릴 때는 이 말이 그렇게 무서웠는데, 지금은 그냥 허탈한 웃음이 났다. 마음대로 하라니. 그동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식당을 나왔다. 등 뒤에서 아버지가 뭔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좋은 말은 아닐 거고, 나쁜 말이어도 이제 상관없었다.
복도를 걸으며 창밖을 봤다. 오늘은 날씨가 맑았다. 어제까지의 흐린 날씨와는 달랐다. 하늘이 이렇게 파랄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파랬다.
그게 무슨 징조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징조 같은 걸 믿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 오늘만은 좀 믿고 싶었다.
방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선우 가문에서 정확히 언제 나를 데리러 올지는 몰랐지만, 미리 준비해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옷장을 열어놓고 뭘 챙기고 뭘 버릴지 고민하는데, 생각보다 챙길 게 많지 않았다. 이 방에서 십몇 년을 살았는데 정작 내 것이라 부를 만한 게 몇 개 없다는 사실이 조금 서글펐다.
짐을 싸는 동안 미르가 들어왔다. 노크도 없이 벌컥. 항상 저런다.
"아가씨, 정말 가시는 거예요?"
"그래."
"선우 가문... 그 댁 도련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아세요?"
사실 나는 선우 가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왕가 방계라는 것, 그리고 나를 원한다는 것 말고는. 그게 다였다. 이름도, 얼굴도, 성격도, 취향도, 아무것도.
"몰라."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근데 알아보면 되겠지."
"알아보면 되겠지, 라니요. 아가씨, 그건 소개팅 나가기 전에 하는 말이잖아요."
"소개팅보다는 훨씬 무겁지 않을까."
"그러니까 더 걱정되는 거죠!"
미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표정도 참 오랜만에 본다. 평소엔 나보다 더 태평한 애가 이럴 때만 진지해진다.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짐 싸던 손을 멈추고 미르를 바라봤다.
"미르야. 여기서 계속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적어도 거기서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아무도 안 물어봤다는 억울함은 없을 거잖아."
미르가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옷장에서 아무 옷이나 하나 꺼내 개기 시작했다. 손을 놀리고 있어야 마음이 편한 타입이다.
짐을 다 싸고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봤다. 세은이 또 그 장미덩굴 옆에 서 있었다. 이번엔 웃고 있지 않았다.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정원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손짓이 격했다. 뭘 저렇게 열심히 따지는 건지.
무슨 일인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제 저 정원도, 저 사람들도, 곧 내 삶에서 멀어질 것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이 집 안의 모든 소란이 앞으로는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이 될 거라는 사실이.
그날 오후, 선우 가문에서 서신이 도착했다. 하녀가 조심스럽게 봉투를 건넸을 때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짧은 내용이었다.
【혼약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흘 후, 저희 가문 사람이 도림가로 찾아가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서명은 【선우겸】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선우겸.
그게 내 새로운 약혼자의 이름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왕가 방계라면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져 있을 법도 한데, 나는 이 이름을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 왕가 방계 가문의 후계자라면 사교계에 최소한 소문이라도 돌았어야 하는데, 이 이름은 완전히 낯설었다. 이 정도로 정보가 없는 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흔한 이름도 아니고.
미르에게 물어봤지만 그녀도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했다.
"선우겸이요? 저도 처음 듣는데요. 왕가 방계라면 보통 사교계에서 한 번쯤은 이름이 돌지 않아요? 그 왜, 누구 도련님이 어디서 뭘 했다더라, 하는 소문."
"그러니까."
"이상하네요."
"그러니까."
우리 둘 다 같은 말만 반복하다가 결국 아무 결론도 내지 못했다.
나는 서신을 다시 읽어봤다. 사흘 후. 사흘 후면 나는 이 사람을 직접 만나게 된다.
창밖으로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붉은 빛이 방 안 가득 스며들었다. 벽지도, 이불도, 내 손에 쥔 서신까지 전부 붉게 물들었다. 나는 서신을 손에 쥔 채 생각했다.
선우겸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그리고 그 사흘 후에 내 인생이 또 어떻게 바뀔지,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불확실함이, 지금까지의 익숙한 절망보다는 덜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이상한 꿈을 꿨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꿈이었다. 목소리는 분명히 처음 듣는 것이었는데,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게 선우겸의 목소리였는지는, 그때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