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음날 아침, 하녀 미르가 방문을 두드리며 다급한 얼굴로 들어왔다.
"아가씨, 지금 가족회의가 열리고 있어요."
"가족회의?" 나는 옷을 갈아입던 손을 멈췄다. "그런 게 있었어? 나는 못 들었는데."
"그게... 아가씨는 부르지 않으셨다고..."
부르지 않았다고.
이 집에서 십칠 년을 살았는데, 나는 여전히 이 집의 시스템에서 로그인이 안 되는 계정이었다. 초대장도 안 오고, 알림도 안 오고, 그냥 조용히 존재만 하는 계정.
미르가 내 표정을 살피며 옷매를 대신 잡아줬다. "아가씨, 저기... 죄송해요. 저도 방금 알았어요."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야." 나는 단추를 마지막까지 채웠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네 잘못이 아니니까."
미르는 그래도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하녀 한 명이라는 게, 생각해보면 좀 웃기지 않나. 내 편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닌, 딱 그 정도의 온도.
나는 서둘러 옷을 마무리하고 응접실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뭔가 잘못됐다. 뭔가 나를 빼놓고 진행되고 있다. 이런 감각, 게임에서 파티원들이 몰래 던전 클리어하고 아이템 나눠 갖는 느낌이랑 비슷했다. 나만 로딩화면에 갇혀 있는 기분.
문 앞에 서니 안에서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선우 가문에서 새로운 혼처를 제안해왔다는 거죠?" 계모 윤서인의 목소리였다.
"그렇습니다. 왕가 방계인 선우 가문에서 지안을 원한다는군요." 아버지의 목소리.
지안을 원한다니. 그건 나잖아. 그런데 왜 나는 이 자리에 없는 거지.
문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가웠다. 손잡이가 차가운 건지 내 손이 차가운 건지 구분이 안 됐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들 나를 쳐다봤다. 아버지, 계모, 세은. 세 사람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내 자리는 애초에 준비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다과도 세 사람 몫뿐이었다. 나를 위한 찻잔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저를 두고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건가요."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아버지가 신문을 접으며 나를 봤다. "마침 잘 왔다. 선우 가문에서 청혼이 왔어. 너와 결혼하고 싶다는군."
"제 의견은 안 물으시나요."
"윤재와의 혼약이 깨진 마당에 다른 곳이라도 정해야지. 네 나이도 이제 늦었다."
늦었다니. 결혼이 깨진 게 겨우 하루 전인데, 벌써 다음 신랑감을 찾고 앉았다. 이 집안의 처리 속도가 이렇게 빠른 걸 처음 알았다. 택배도 이렇게 빨리 안 온다.
"제가 원하지 않으면요."
아버지의 표정이 굳었다. "지안아. 이건 네가 원하고 안 원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 뭔데요."
"집안의 문제야."
집안. 그 단어가 참 편리하게 쓰였다. 내가 필요할 땐 집안, 내가 필요 없을 땐 아무것도 아닌. 이 단어 하나로 얼마나 많은 걸 정당화할 수 있는지, 아버지는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계모 윤서인이 끼어들었다. "지안아, 너도 알잖니. 네 스킬로는 좋은 혼처 구하기 힘들어. 선우 가문 정도면 감사해야 할 자리야."
감사. 그 단어가 목구멍에 걸렸다.
"어떤 스킬인지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
"물어볼 필요가 있니? 다들 아는 사실인데." 윤서인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 여자는 웃으면서 사람을 찌르는 재주가 있다. 표정만 보면 다정한데 내용은 늘 칼이었다.
"세은이는요." 나는 물었다. "세은이는 윤재 님과 결혼하는 건가요?"
세은이 눈을 피했다. 아버지가 대신 답했다.
"그래. 이미 그렇게 결정됐다."
이미 결정됐다니. 언제. 나도 없는 자리에서. 나와 관련된 일인데 나만 몰랐던 이 상황.
나는 세은을 봤다. 세은은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저 버릇은 그대로다. 뭔가 잘못했다고 느낄 때 손을 만지는 버릇. 그런데 이번엔 미안한 기색조차 오래 가지 않았다. 손을 만지는 것도 잠깐, 곧 계모의 팔을 잡으며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럼 저는요. 선우 가문과의 혼약, 이것도 이미 결정된 건가요?"
아버지가 잠시 침묵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봐야지. 이미 답장을 보냈으니까."
답장을 보냈다니. 내가 이 방에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회의라고 부르지도 마시지. 통보를 회의라고 부르면 곤란하지 않나.
"답장을 언제 보내셨는데요."
"어제 저녁에."
어제 저녁. 윤재와의 혼약이 깨졌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게 그날 낮이었다. 반나절도 안 돼서 다음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는 소리다. 나는 무슨 재고 처리 상품인가. 반품되자마자 바로 재출고.
"제 의사는 물어보실 필요도 없었나 보네요."
"지안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결정이다."
나를 위한 결정. 나를 빼고 내려진, 나를 위한 결정이라니. 이 문장은 이 집안에서만 통용되는 특수 문법인가 보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냥 서서, 이 상황을 눈에 담았다. 아버지의 접힌 신문, 계모의 웃는 얼굴, 세은의 손, 그리고 나를 위해 준비되지 않은 빈자리 하나.
아버지는 신문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계모는 세은의 손을 잡고 뭔가 소곤거렸다. 세은은 여전히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아무도, 정말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이 서늘하게 맑아졌다. 마치 뜨거운 물에 데었다가 어느 순간 감각이 사라지는 것처럼.
"알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평온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나는 응접실을 나왔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치 어떤 페이지가 완전히 넘어갔다는 신호처럼.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이게 내 가족이라고. 이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고. 초등학교 다닐 때 다들 가족 사랑 그림을 그려오라고 하면 나는 늘 뭘 그려야 할지 몰라서 애매하게 꽃밭이나 그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이미 답이 나와 있었던 거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창문 너머로 정원이 보였다. 어제 봤던 그 장미덩굴. 오늘은 유난히 시들어 보였다. 아니, 어쩌면 시든 건 장미가 아니라 내 눈이었을지도.
방에 들어와 문을 잠갔다. 침대에 앉아 두 손을 내려다봤다. 떨리고 있었다. 아까는 참았는데 지금 와서 떨렸다. 손을 맞잡아 봐도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 이런 걸 두고 다들 충격이라고 하는 건가. 신기하게도 몸이 먼저 안다. 머리는 담담한 척 굴어도 몸은 솔직하게 반응한다.
선우 가문. 왕가 방계. 나는 그 가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이름 정도만 스치듯 들었을 뿐, 어떤 사람들인지, 나를 원한다는 그 사람이 어떤 성정을 가졌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데 이미 내 인생의 다음 페이지가 정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내 인생이라는 소설을 대신 써 내려가고 있는데, 나는 그걸 나중에서야 결과만 통보받는 독자인 셈이었다.
창밖에서 하녀들이 뭔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정원사가 계모의 지시를 받고 뭔가 옮기고 있었다. 커다란 상자였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상자에 적힌 글자만은 또렷하게 읽혔다.
【도세은 혼수 목록 - 1차】
혼수. 벌써.
결혼식 날짜도 안 잡혔는데 혼수를 준비하고 있다니. 이 집안은 정말 발이 빠르구나, 나만 빼고.
나는 그 상자가 하나둘 늘어나는 걸 한참 지켜봤다. 두 개, 세 개, 네 개. 정원사가 오갈 때마다 상자는 계속 쌓였다. 저 집이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신났을지, 상자 개수만 봐도 짐작이 갔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를 위한 상자는, 지금 이 순간 어디선가라도 준비되고 있을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없다. 아무도 나를 위해 상자를 싸주지 않는다. 나는 그냥 다음 목적지로 보내지는 짐짝일 뿐이었다.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그 상자 안에 뭐가 들어갈지도,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