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열네 살 생일이라는 게 이렇게 무거운 행사인 줄은 몰랐다. 공작저의 대연회장은 새벽부터 꽃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정원사들이 밤을 새워 옮겨 심었다는 백합이 기둥마다 휘감겨 있었고, 샹들리에마다 매달린 크리스털이 아침 햇살을 받아 부서지듯 반짝였다. 그 화려함이 오히려 나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이럴 거면 그냥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는데.' 열네 살이 뭐 그리 대단한 나이라고 이렇게까지 사람을 잡아 세우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공작가의 딸로 태어난 이상 생일조차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시녀 다은이 코르셋을 조이며 숨도 못 쉬게 만들 때마다 나는 이게 생일 축하인지 형벌인지 헷갈렸다. "아가씨, 조금만 더 참으세요. 허리선이 살아야 드레스가 예쁘게 나와요." 다은이 등 뒤에서 끈을 당길 때마다 나는 벽에 손을 짚고 헛기침을 삼켰는데, 숨이 턱 막히는 와중에도 머릿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나라 귀족들은 다 이렇게 갈비뼈를 압박해서 예의범절을 배우는 걸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확실히 예뻤다. 은빛 자수가 놓인 드레스 자락이 발목까지 흘러내렸고, 머리에는 어머니가 직접 골라준 진주 장식이 얹혀 있어서, 촛불 아래 서면 꼭 인형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예쁨이 전부 다른 사람들 눈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나를 위한 예쁨이 아니라 남들이 보고 흡족해할 예쁨이라는 것.
"자, 다 됐어요. 이제 목걸이만 걸면 끝이에요." 다은이 목 뒤로 손을 뻗어 걸쇠를 채우는 동안 나는 거울 속의 나와 눈을 맞췄다. 열네 살짜리 얼굴에 열네 살짜리 마음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게, 그게 제일 이상했다.
아버지 선재현 공작은 왕국에서 손꼽히는 권력자였고, 그 덕에 오늘 파티에는 백작가와 남작가는 물론이고 왕실 인사까지 얼굴을 비쳤다고 다은이 귀띔해 주었다. "아가씨, 오늘은 특히 조민혁 도련님이 오시니까 더 신경 쓰셔야 해요. 그, 소문 들으셨죠? 이번에 왕실에서 훈장 받으신 거."
"들었어. 세 번째로 말해주는 거야, 그거." 나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웃겼다. 다은은 조민혁 얘기만 나오면 눈을 반짝이는 버릇이 있었는데, 나보다 더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조민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손끝이 저절로 목걸이를 매만졌다. 열두 살 때부터 정해진 약혼자였던 그와는 벌써 이 년을 함께해 온 사이였고, 그래서인지 오늘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배 속이 간질거렸다. '오늘은 좀 다정하게 웃어줄까.' 지난달 정원에서 만났을 때는 유독 말이 없었고, 그전 무도회에서는 내 손을 잡고 춤을 추다가 갑자기 화제를 돌리는 게 어색해서, 요즘 그가 뭔가 나한테 숨기는 게 있나 싶기도 했지만 나는 애써 그 생각을 밀어냈다. 약혼자 사이에 무슨 비밀이 있겠어, 하고.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이 몰리는 걸 느꼈다. 다들 겉으로는 축하한다며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 담긴 계산이 뻔히 들여다보여서 나는 새삼 귀족 사회라는 게 참 피곤한 곳이라는 생각을 다시 했다. 저 뒤편에서 부채를 흔들며 소곤거리는 백작 부인들의 눈빛은 내 드레스 값을 매기고 있었고, 그 옆에서 술잔을 든 남작가 자제들은 내가 아니라 내 뒤에 서 있는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축하는 무슨, 다들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데.'
어머니 조혜란은 내 손을 꼭 잡으며 오늘 하루만큼은 걱정 말고 즐기라 했다. "오늘만큼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웃어. 그거 하나면 돼."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어딘가 불안한 기운을 떨치지 못했는데, 그건 순전히 조민혁이 아직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래 이런 자리엔 제일 먼저 도착해서 옆자리를 차지하던 사람이었는데. 시계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손목에는 시계가 없었고, 그저 창밖으로 기울어가는 햇살의 각도만으로 시간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악단의 연주가 흐르는 사이 손님들 사이를 오가며 인사를 나누다가, 오빠 선지호가 슬쩍 다가와 어깨를 짚었다. "긴장했어?" 세 살 위인 오빠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늘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는데, 오늘만큼은 그 표정 아래 뭔가 다른 게 숨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괜히 마음이 서늘해졌다. 평소라면 장난스럽게 내 머리를 헝클이거나, 지나가는 시녀에게 슬쩍 눈짓을 하며 나를 놀렸을 텐데, 오늘은 팔짱을 낀 채 시선을 자꾸 입구 쪽으로 던지고 있었다.
"조민혁은 어디 있어?" 물었더니 오빠는 잠깐 시선을 피했다. "그게, 조금 늦나 봐. 별일 아닐 거야." 대답의 속도가 평소보다 느렸고, 말끝이 살짝 흐려졌는데, 그 반응 하나로 뭔가 잘못됐다는 예감이 확신처럼 자리 잡았다. 나는 오빠를 붙잡고 더 물으려 했지만, 마침 근처를 지나던 백작 부인이 인사를 건네는 바람에 대화가 끊겼고, 그사이 오빠는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버렸다. '분명 뭔가 알고 있는데.'
케이크가 들어오고 촛불을 끄는 순서까지도 조민혁은 나타나지 않았다. 열네 개의 촛불이 은쟁반 위에서 흔들리는 걸 보면서, 나는 손님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져가는 걸 느꼈다. 처음엔 그저 부채질 소리 같던 것이 점점 또렷한 속삭임으로 변해갔고, 몇몇은 아예 대놓고 입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려 애썼다. '설마 사고라도 난 건 아니겠지.' 마차가 뒤집혔거나, 말이 놀라서 다쳤거나, 아니면 그냥 옷을 갈아입다가 시간을 놓쳤거나. 나쁜 쪽으로만 생각이 뻗어가는 걸 억지로 붙잡고, 대신 좋은 쪽으로 상상해 보려 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가 짧게 축사를 마쳤다.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전하며, 제 딸의 열네 번째 생일을 위해 잔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짧고 담백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시종이 잔을 나르고, 손님들이 하나둘 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 나는 내 옆자리가 여전히 비어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열두 살 때부터 이 자리는 늘 조민혁의 자리였다. 그가 없는 이 자리가 유난히 넓어 보였다.
잔을 들어 축배를 청하려는 순간, 연회장 입구 쪽에서 문이 크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 쿵, 하는 소리가 대연회장의 높은 천장에 부딪혀 울렸고, 그 여파로 촛불 몇 개가 흔들리며 꺼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는데, 그게 반가움인지 불안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조민혁이었다. 늦게라도 왔으니 다행이라고, 그 순간까지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그 뒤로, 처음 보는 여자의 손을 붙잡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