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이틀 동안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냥 어둠 속에 떠 있었을 뿐이었고, 그 어둠 안에서는 시간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침대 옆에서 눈이 새빨개진 채 앉아 있는 다은이었고, 그 다음으로 들려온 건 창밖에서 새가 지저귀는 평화로운 소리였는데, 그 평화로움이 지금 내 상황과 너무 안 맞아서 오히려 헛웃음이 나왔다. '새는 참 팔자 좋다.' 몸을 조금 움직이려 하자 팔다리가 무거운 돌덩이처럼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고, 입안은 사막처럼 말라 있었다.
"아가씨!" 다은이 울먹이며 내 손을 붙잡는 걸 보고서야 나는 내가 정말로 이틀이나 잠들어 있었다는 걸 실감했다. '기절도 이렇게 오래 할 수 있는 거구나.' 다은은 내 손을 잡은 채로 어깨를 떨었는데, 그 떨림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가 손바닥을 통해 그대로 전해져서, 나는 잠깐 이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울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 좀…."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고, 다은은 화들짝 놀라며 협탁 위의 물잔을 들어 내 입에 대주면서도 손이 덜덜 떨려서 물이 조금 흘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사과할 일도 아닌데 계속 사과하는 다은을 보며 나는 오히려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적어도 이 방 안에서는 내가 걱정받는 사람이었다.
의식을 잃은 사이 벌어진 일들을 다은에게서 조금씩 전해 들었는데, 소문이라는 게 얼마나 빠르고 무자비하게 퍼지는지를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다은은 처음엔 말을 아끼려 했지만, 내가 몇 번 더 캐묻자 결국 참지 못하고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공작가 파티 얘기가 벌써 사교계 전체에 퍼졌대요. 사람들이 다들 그 얘기만 한다고… 죄송해요, 제가 이런 말씀 드려서." "괜찮으니까 계속 말해봐." 나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냈지만 속으로는 이미 짐작이 가고 있었다. 공작가 생일 파티에서 벌어진 공개 파혼 사건은 이미 왕도의 사교계 전역에 퍼져나갔고, 백서린은 그 소문의 확산을 오히려 즐기듯 몇몇 자리에서 자신과 조민혁의 관계를 은근히 흘리고 다닌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왔다. "그 여자가 직접 그랬대요, 무슈 조와는 원래부터 특별한 사이였다고, 아가씨는 그냥…." 다은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는데, 그 뒤에 이어질 말이 뭔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냥 발판이었다, 뭐 그런 거겠지.' 나는 이불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속에서 뭔가가 계속 뒤틀리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여자 얼굴 한번 다시 보고 싶네."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데, 말투가 너무 태연해서 다은이 오히려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지금 그런 말씀 하실 상황이 아니에요." "아니, 진짜로. 어떤 얼굴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 궁금해서." 나는 웃으려고 했는데 웃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대신 목 안쪽에서 뭔가 씁쓸한 게 올라왔다. 이틀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그 파티장의 광경이, 조민혁의 표정이, 백서린의 웃음소리가 여전히 눈앞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오빠 지호는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방으로 뛰어들어와서는, 평소처럼 여유로운 표정 대신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내 앞에 무릎을 꿇듯 앉았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다은이 화들짝 놀라 일어섰고, 오빠는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 침대맡으로 다가왔는데, 옷차림을 보니 방금까지 뭘 하다 왔는지 셔츠 소매가 반쯤 걷어 올려진 상태였다. "유나야, 미안해. 내가 더 빨리 막았어야 했는데." 오빠의 목소리가 떨리는 걸 듣자 오히려 내가 위로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그건 오빠가 그 자리에서 조민혁에게 던진 그 한 마디, '후회 안 할 자신 있어?'가 지금도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빠 탓 아니야. 그리고 오빠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걸 했잖아." "그게 뭐가 할 수 있는 거야, 나는 그냥 소리만 질렀지." 오빠는 자기 무릎을 손바닥으로 탁 치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평소보다 훨씬 어린애 같아서 나는 잠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오빠도 이런 얼굴을 할 수 있구나.'
"오빠가 있어서 그나마 견딜 수 있었어." 그렇게 말하자 오빠는 잠시 말을 잃은 채로 내 손을 꽉 잡았다가, 곧 낮게 중얼거렸다. "그놈, 사교계에서 완전히 낙인찍히게 만들어줄게." 그 말투가 너무 진지해서 나는 오히려 조금 무서워졌는데, 오빠가 저런 눈빛을 하는 걸 본 게 몇 년 만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떻게 할 건데?" 내가 묻자 오빠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일단 그 자식이랑 거래하던 상단 몇 개는 이미 손봐놨고, 두 번째로 그 자식 아버지가 노리고 있던 자리도 내가 슬쩍 얘기해서 물 건너가게 만들었고, 세 번째로는—" "오빠, 그거 다 사실이야?" 내가 반쯤 질린 얼굴로 묻자 오빠는 그제야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 한가운데서 팔을 벌리고 한 바퀴 돌았다. "믿음이 안 가면 안 되지, 이 오빠가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데." 그 과장된 몸짓에 나는 결국 픽 웃음을 흘렸고, 다은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살짝 웃었다.
그 다짐이 진짜 위협인지 그냥 오빠의 화풀이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말이 나에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적어도 나 혼자 남겨진 건 아니구나.' 창밖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처음으로 눈물을 조금 흘렸는데, 그건 슬픔보다는 안도에 더 가까운 눈물이었다. 오빠는 그런 나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손을 계속 잡아주었는데, 그 침묵이 오히려 어떤 위로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오빠가 나가고 나서, 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지난 이틀 동안 내가 놓친 시간들을 곱씹어보았다. 파티장의 불빛, 사람들의 시선, 조민혁의 표정, 백서린의 웃음소리, 그리고 내가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음들. 그 모든 것이 뒤섞여서 하나의 흐릿한 그림처럼 남아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슬픔보다는 어떤 냉정한 계산 같은 것이 먼저 들어섰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없었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그저 울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확신은 있었다.
그날 밤 늦게, 아버지가 방문을 두드렸다. 평소 위엄 있는 걸음걸이로만 기억되던 아버지가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마치 유리로 된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레 침대 옆에 앉으셨다. 문 두드리는 소리부터 평소와 달랐는데, 언제나 한 번 짧게 두드리고 바로 들어오던 분이 이번엔 두 번, 세 번을 두드리고도 잠깐 기다렸다가 문을 여셨다. "자고 있으면 그냥 나갈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며 침대 옆 의자를 끌어와 앉으셨는데, 그 무게조차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유나야."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흔들림을 느꼈고, 나는 그 순간 이 사람도 딸의 아픔 앞에서는 그저 아버지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평소 같으면 가문의 명예니 체면이니 하는 말부터 나왔을 텐데, 이번엔 그런 말이 하나도 없었다. "몸은 좀 어떠냐."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없지." 아버지는 짧게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셨는데, 그 옆얼굴에 잡힌 주름이 평소보다 훨씬 깊게 보였다. "내가 이번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그 말과 함께 아버지가 내 손을 꼭 잡으셨는데, 그 손의 온도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놓게 만들었다. 크고 딱딱한 손인데도 지금은 어딘가 서투르게 느껴졌고, 나는 그 서투름이 오히려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하실 건데요." 내가 묻자 아버지는 잠시 침묵하셨다. 그 침묵이 길게 이어질수록 나는 아버지가 이미 무언가 계획을 세워두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네가 몰라도 된다." "저한테 벌어진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더 몰라도 된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고 단호해서 나는 더 캐물을 수가 없었는데, 그 단호함 안에 어떤 위험한 결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불안이 더 커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이 사건이 앞으로 더 큰 파장을 몰고 올 거라는 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방을 나가시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둠 속에서 천장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오빠의 다짐과 아버지의 침묵, 그 두 가지가 겹쳐지면서 어쩐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복잡하게 얽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그 예감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