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열네 살, 파혼 대신 약학을

2화

생일 파티라는 게 원래 이렇게 살얼음판 위에서 벌어지는 행사였던가. 촛불 백 개를 켜놓은 것 같은 샹들리에 아래, 은쟁반에 담긴 케이크와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 하프 연주자가 켜는 현악 소리까지,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된 밤이었다. 내 생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조민혁과의 약혼을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으니까. '적어도 어제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연회장 입구 쪽에서 걸어 들어오는 순간부터 시선을 확 잡아끄는 타입이었는데, 화려하게 틀어 올린 붉은 머리는 조명 아래서 유독 반짝였고 눈매는 처음부터 도발적으로 휘어 있었다. 남작가의 영애 백서린이라는 이름은 사교계 소문 속에서 종종 스쳐 지나갔지만, 직접 얼굴을 마주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누구지, 왜 조민혁이랑 손을 잡고 들어와.' 처음엔 정말 별생각 없었다. 그저 어느 귀족가의 손님이 동행 삼아 따라온 거겠지, 그 정도로 넘겼다. 조민혁이 원래 인맥 관리에 열심인 사람이니 저런 자리에 낯선 얼굴을 데려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고,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 믿음이 얼마나 순진했는지는 곧 알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 그 직후였다.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지고 있었는데, 나만 그 파도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느낌이었다.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눈을 굴리는 귀부인들, 잔을 든 채로 시선을 피하는 청년들, 다들 뭔가를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는 것 같은 그 불쾌한 소외감. '설마, 아니겠지.' 나는 그 순간까지도 애써 낙관적인 쪽으로 생각을 밀어붙이려 했다. 조민혁이 연회장 중앙, 내 바로 앞까지 걸어와 멈춰 섰을 때, 나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미안함이나 긴장 같은 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홀가분한, 몹시 듣기 싫은 여유가 얼굴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미뤄왔던 숙제를 드디어 해치우기로 마음먹은 사람의 표정 같았달까. 그의 손끝은 백서린의 손등 위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고, 나는 그 두 사람의 팔이 만들어낸 각도가 절대 처음 만난 사이의 것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유나, 오늘 같은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미안하다면서 왜 하필 오늘, 왜 하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케이크에 촛불도 아직 안 껐는데. 나는 속으로 그 말을 되뇌었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목이 완전히 잠겨버린 것 같았다. "우리 약혼은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어." 그 말이 귓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연회장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사라진 것 같았다. 하프 연주도, 웅성거림도, 잔이 부딪히는 소리도, 전부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아득해졌다. 나는 내가 지금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입가에 뭔가 힘이 들어가긴 했는데 그게 미소인지 경련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백서린이 그의 팔에 자기 팔을 슬쩍 감으며 웃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마치 이 순간을 몇 번이나 연습한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민혁 님이 워낙 다정하셔서 이런 자리까지 신경 쓰신 거예요." 다정하다니. 다정한 사람이 약혼녀 생일 파티에 다른 여자를 데려와서 파혼을 선언하나. 그것도 케이크 촛불도 안 끈 상태에서? 나는 속으로 그렇게 비꼬았지만 그 비아냥이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뭉텅뭉텅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백서린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그 시선이 어찌나 태연했는지, 마치 상점에서 상품의 질을 가늠하는 눈빛 같았다. "공작 영애님도 이제 자유로워지셨으니 좋으시겠어요. 민혁 님은 이미 저랑 밤을 함께 보낸 지도 오래됐거든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연회장 안 여기저기서 숨죽인 탄식과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잔을 놓칠 듯 흔들거렸고, 누군가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넘어 아예 감각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손끝부터 시작해서 팔, 어깨,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덜미까지, 마치 온몸의 신경이 하나씩 스위치를 내리는 것 같았다. '이건 그냥 나쁜 꿈이야.' 손끝이 차갑게 굳어가는 동안에도 머리로는 자꾸 이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다. 이런 식의 파혼 통보는 삼류 연극에서나 나오는 거 아닌가. 생일 파티, 다른 여자, 그것도 밤을 함께 보냈다는 폭탄 발언까지, 너무 완벽하게 잔인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나를 향해 꽂혀 있는 걸 보니 이게 현실이라는 사실을 도무지 피할 수가 없었다. 저 시선들 하나하나가 전부 나를 향한 동정과 경멸이 반쯤 섞인 눈빛이었고, 나는 그 눈빛의 무게를 견디는 법을 여태까지 배운 적이 없었다. 조민혁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옅게 웃기까지 했다. 그 웃음이 마치 오래 참았던 숙제를 끝낸 사람의 표정 같아서, 나는 그 순간 내가 알던 그가 누구였는지조차 헷갈렸다. 이 년을 함께한 약혼자였는데. 매년 이 시기쯤 함께 정원을 산책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는 그 사람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게 원래 얼굴이었고 내가 봐온 게 가면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지만 그 답을 알아낼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시야 가장자리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때 오빠가 내 앞을 가로막듯 성큼 나섰다. 지호 오빠의 걸음에는 평소의 여유로운 리듬이 전혀 없었고, 대신 절제된 분노가 어깨 선을 따라 팽팽하게 서 있었다. "조민혁." 낮게 깔린 그 한 마디에 연회장 온도가 한순간에 내려간 것 같았다. 지호 오빠는 늘 여유롭던 표정을 완전히 지운 채로 조민혁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한 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그 목소리에는 위협이라기보다 확신이 담겨 있었고, 마치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이 상대에게 마지막 경고를 주는 듯했다. 조민혁의 얼굴에서 순간 여유가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고 입꼬리가 굳는 걸 나는 분명히 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고, 그는 대답 대신 백서린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려버렸다. 그 뒷모습이 어찌나 태연했는지, 마치 방금 벌어진 일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무게도 없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는 듯했다. 오빠가 그 뒷모습을 향해 뭐라 더 말하려는 순간, 나는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발밑의 대리석 바닥이 갑자기 멀어지는 것 같았고,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뭉개지듯 흩어졌다. 시야가 점점 하얗게 흐려지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나를 향해 다급히 뻗어오는 오빠의 손이었다. 그 손이 닿기 전에 나는 이미 의식의 끄트머리를 놓아버렸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