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이강 왕자가 태어난 지 이 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여전히 궐의 침녀로 남아 있었다.
승진도 좌천도 없이, 그저 흐르는 물처럼 살았다.
바늘을 잡고, 옷감을 잡고, 또 바늘을 잡는 나날.
'이러다 손끝에 바늘 자국만 남고 인생은 그대로 끝나는 거 아닌가.'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별수 없었다. 궐이라는 곳은 원래 그렇게 굴러가는 곳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이 년 사이, 궐 안 분위기가 조금씩 이상해졌다는 걸 나는 눈치채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기분 탓인가 싶었다.
하지만 옷감을 나르며 복도를 지나다닐 때마다, 뭔가 공기가 달라져 있다는 걸 자꾸 느꼈다.
왕비의 처소를 드나드는 대신들의 얼굴이 예전과 달랐다.
예전에는 축하와 인사가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저마다 계산이 얽힌 표정이었다.
웃고 있어도 눈은 안 웃는, 그런 얼굴들.
'저 얼굴, 낯익다. 딱 돈 냄새 맡은 얼굴이잖아.'
나는 바느질감을 옮기다 그런 대신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른 고개를 숙였다.
괜히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었다. 침녀는 조용히 있는 게 최선이라는 걸, 나는 이미 뼈저리게 배운 사람이었다.
'파벌이라는 게 이렇게 생기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등 뒤가 조금 서늘해졌다.
왕태자였던 이환과 왕태자비 조씨가 즉위해 왕과 왕비가 된 뒤로, 궐의 권력 구도는 완전히 재편되었다.
새 왕과 왕비가 자리에 오른 날, 궐 전체가 들썩였다.
축포가 터지고, 대신들이 도포를 갈아입고, 시비들은 새 전각의 장식을 준비하느라 밤을 새웠다.
그 화려한 소란 뒤로, 조용히 다른 계산들이 오가고 있었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외척 가문들은 저마다 왕손의 사부 자리를 노렸다.
사부 자리는 곧 후계자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으니까.
아기 옆에 사람을 심어두면, 그 아기가 자라는 이십 년, 삼십 년 동안 계속 곁에 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애 하나 키우는데 이렇게 다들 달려드나.'
나는 그게 참 우스웠다. 갓 걸음마도 못 뗀 아기한테 대체 무슨 정치적 가치가 있다고.
하지만 그 우스운 계산이 궐을 움직이는 진짜 논리라는 걸, 나는 곧 알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최상궁의 처소 근처에서 우연히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엿들었다고 하면 좀 그렇지만, 사실 복도가 좁아서 안 들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날은 옷감을 나르다 발을 헛디뎌서, 하필 그 벽 바로 옆에서 잠깐 멈춰 서 있어야 했다.
'일부러 안 들었다니까요.'
"제1왕자님 사부로 정도헌 학자를 모신다고요?"
"그렇습니다. 이미 재가가 났습니다."
목소리에 물기 하나 없이 단호했다.
이미 결정 났다는 말투.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강조하려는 듯 딱딱했다.
정도헌이라는 이름은 나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조정에서 가장 이름난 학자로, 경서와 병법에 통달했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빨래를 널면서 나이 든 상궁들이 그 이름을 언급하며 감탄하던 기억도 있었다.
"그 어른이 상소를 올리면 왕도 며칠은 고민하신다더라."
그런 말이 나올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런 대학자가 겨우 두 살 갓 넘은 왕자의 사부로 배치된다는 게 좀 이상했다.
'아기가 뭘 배운다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애한테 경서를 가르친다는 게 말이 되나.
젖니도 다 안 났을 텐데.
하지만 곧 이해가 됐다.
제1왕자의 사부 자리는 단순히 교육이 아니라, 미래 권력의 씨앗을 심는 자리였다.
일류 학자를 붙여둔다는 건, 그 학자가 대표하는 파벌 전체가 왕자에게 줄을 대는 일이었다.
정도헌 하나가 아니라, 그의 문하생들과 그를 따르는 조정 신료들 전체가 이강 왕자 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가 아니라 애 뒤에 붙는 어른들이 진짜 목적이라는 거지.'
그제야 그림이 맞춰졌다. 정치라는 게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하고 나는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이강 왕자 주변에는 정도헌을 비롯해 이름난 학자 세 명이 차례로 배치되었다.
한 명, 두 명, 세 명.
발표가 날 때마다 궐 안이 한 번씩 들썩였다.
조정에서는 이걸 두고 은근한 뒷말이 돌았다.
"너무 과하지 않소."
"과하다니, 왕손이신데."
"왕손이라 해도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기 아닙니까."
"그러니 더 일찍 좋은 스승을 붙여야지요."
말은 그럴싸했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저 셋의 자리는 교육이 아니라 자리 선점이라는 걸.
'셋이라니. 욕심도 참.'
나는 옷감을 정리하며 그 뒷말들을 흘려들었다. 어차피 내가 낄 자리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몇 달 뒤, 두 번째 소식이 궐 안을 흔들었다.
왕비가 다시 임신했고, 이번엔 아들이었다.
제2왕자 이헌이었다.
소식이 퍼지던 날, 궐은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첫째 때와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경사스러운 건 맞는데, 어딘가 뜨거움이 덜했다.
'벌써 관심이 시들었나.'
축하연도 좀 더 조촐했고, 사람들 목소리도 좀 더 잦아들어 있었다.
나는 그 낙차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이헌 왕자가 태어난 날,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다만 그날 밤, 최상궁의 처소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유난히 딱딱했다는 걸 전해 들었다.
전해준 사람은 나와 함께 침방에서 일하는 동무였는데, 그날 밤 그 근처를 지나다 우연히 들었다며 목소리를 낮춰 얘기해줬다.
"제2왕자님 사부는 누구로 정했습니까?"
"한서준으로 정해졌습니다."
"그 사람 하나뿐입니까?"
"예. 그 하나뿐입니다."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 침묵이 있었다고 했다.
그 짧은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는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한서준이라는 이름은 그때 처음 들었다.
젊은 학자라고 했다.
언어와 문장에 능하다는 평가는 있었지만, 정도헌처럼 조정 전체를 대변할 만한 배경은 없었다.
외척 세력도 없었고, 학맥도 크지 않았다.
'그러니까 배경 없는 사람 하나 붙여준 거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답이 나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배치는 실수가 아니라 방기였다.
조정 대신들 대부분이 이미 이강 왕자 쪽에 붙어버린 뒤였고, 제2왕자 쪽에는 아무도 자기 사람을 심으려 하지 않았다.
한서준은 그저 남은 자리를 채우기 위해 급하게 데려온 인물이었다.
누구도 원하지 않은 자리에, 누구도 원하지 않은 사람이 앉은 셈이었다.
'이건 좀 서글프다.'
"셋이랑 하나면, 이건 뭐 시작부터 기울어진 거 아니에요?"
동무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바늘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누가 들으면 큰일 나."
"근데 사실이잖아요."
사실이긴 했다. 그래서 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왜 하나뿐이지.'
나는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첫째 왕자에게는 셋, 둘째 왕자에게는 하나.
숫자만 봐도 균형이 맞지 않았다.
아기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울고, 젖을 먹고 있을 텐데, 그 위에는 벌써 이렇게 저울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들으며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바늘을 쥔 손끝이 살짝 떨렸다.
왠지 이 불균형이, 두 아이 사이에 조용히 금을 긋는 첫 삽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냥 내 기분 탓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그 예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직접 그 금 안으로 밀어 넣는 방식으로 실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