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한마디, 왕자를 갈랐다

3화

제2왕자 이헌의 유모로 낙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처음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저요?" "그래, 너." 최상궁의 대답은 짧고 명확했다.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제가 왜요? 저는 그냥 궁녀인데요." "왜냐고 묻는 게 더 이상하다. 명 내려왔으면 그대로 하는 거지." 최상궁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설명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 바닥에서 이유를 묻는 건 사치라고 했지, 참.' 궐에서 몇 년을 버틴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치였다. 위에서 내려온 명은 그냥 받는 거다. 이유를 캐물으면 괜히 눈 밖에 난다. 왜 이번엔 나였을까. 나중에 들으니 이유는 단순했다. 아영은 이번에도 유모 후보에 올랐지만, 그녀의 친정 가문이 최근 조세 문제로 조정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대신들 사이에서 그 가문 이름이 오르내릴 때마다 왕비의 얼굴이 굳어졌다는 소문도 함께 돌았다. 왕비는 그런 배경을 가진 여자를 둘째 아들 곁에 두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배경이 없었다. 부모도 이미 세상을 떠났고, 친척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도 없었다. 궐에 들어올 때부터 나를 밀어줄 사람도, 끌어내릴 사람도 없는 처지였다. 배경이 없다는 게 이번엔 오히려 장점이 됐다. '허, 웃기네. 없는 게 스펙이 되는 날도 있구나.' 살다 보니 별일이었다. 그동안은 배경 없는 게 늘 발목을 잡았는데, 이번엔 그게 오히려 방패가 됐다. 세상 일이란 참 요지경이다. 그렇게 나는 제2왕자 이헌의 유모가 되었다. 처음 그 방에 들어갔을 때, 이헌은 포대기에 싸여 곤히 자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다가가자 눈을 번쩍 뜨더니 나를 빤히 쳐다봤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아기였는데, 유난히 눈을 오래 마주치는 아이였다. 다른 아기들은 눈을 마주치다가 이내 흐리게 돌리는데, 이헌은 계속 나를 쳐다봤다. 그 작은 눈동자가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잠깐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뭐야, 이 아기. 사람 눈치 보는 거야?' '이 아기 좀 이상하게 똘똘한데.'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아기가 좀 별나긴 해도, 아기니까. 그렇게 넘겼다. 유모가 된 뒤로 나는 명주와 자주 마주쳤다. 명주는 제1왕자 이강의 유모였다. 대범하고 순진한 성격이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궁정 정치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어머, 서연 언니. 이제 유모시네요." "그러게요. 얼떨결에." "얼떨결이 어딨어요. 다 능력이지." 명주는 그렇게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화법을 가진 여자였다. 궐에서 몇 년을 살아도 저렇게 순진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명주 씨는 안 힘들어요? 왕자님 곁에 학자가 셋이나 붙어 있다면서요." "힘들긴요. 저는 그냥 밥 잘 챙겨주고 잘 재우면 돼요. 공부는 그분들 몫이지." '그 말대로만 되면 참 편하겠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명주는 정말 아무 걱정이 없는 얼굴이었다. 나는 저런 얼굴로 이 궐을 다닐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궐의 분위기는 명주처럼 편하지 않았다. 이강 왕자 곁에는 정도헌을 비롯한 학자 셋이 붙어서 매일같이 경서를 가르쳤고, 조정에서는 그 성과를 두고 은근히 소문을 냈다. "이강 왕자님, 벌써 천자문을 떼셨답니다." "과연 셋이나 붙었으니 그렇겠지요." 그런 이야기가 오갈 때마다 나는 슬쩍 이헌의 방을 떠올렸다. 학자 한 명, 그것도 겨우 하루 한 시간씩 들어오는 정도였다.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구조였다. '뭐, 형제인데 굳이 비교할 필요가 있나.' 나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나는 유모일 뿐이니 그런 비교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헌 왕자 곁에는 한서준 혼자였다. 한서준은 매일 아침 이헌의 방에 들어와 짧은 문장을 가르쳤다. 그는 젊고 성실한 학자였는데, 크게 유명한 가문 출신도 아니었고, 그래서인지 늘 조심스러운 태도로 이헌을 대했다. 이헌은 아직 어렸지만, 곧잘 따라 말했다. 짧은 단어부터 시작해서 어느 순간엔 짧은 문장까지 곧잘 외웠다. 한서준은 그런 이헌을 보며 종종 감탄했다. "이 나이에 벌써 이 문장을 외우다니." 그럴 때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이헌을 안고 있다가, 그 감탄이 반복될 때마다 은근히 뿌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내가 키우는 아이가 잘한다는데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었다. 그날 나는 마루 끝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을 볕이 마루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한서준은 낮은 목소리로 시구를 읽어주고 있었다. 이헌은 그 소리를 따라 조그만 입을 오물거리며 발음을 맞췄다. 이헌이 짧은 시구 하나를 정확하게 외워냈다. 한서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무릎을 치며 크게 웃었다. "이야, 왕자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나는 그 옆에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가 뭔가를 해냈다는 사실이 나까지 기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어머, 왕자님. 형님보다 낫으시네요." 그 말은 그냥 그 자리를 채우려는 가벼운 칭찬이었다. 유모라면 다들 그렇게 말한다. 아이 앞에서, 아이를 기분 좋게 하려고. 명주도 이강 앞에서 비슷한 말을 자주 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냥 인사치레지, 뭐.' '다들 하는 말이잖아. 뭐가 문제야.'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한서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웃고 있던 얼굴이 순간 굳었다가, 다시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는 그 짧은 틈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어, 왜 저래.'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별일 아니라고 넘겼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시녀 하나가, 그 말을 밖으로 옮겼다. 며칠 뒤, 그 말은 궐 안 여러 처소를 돌며 조금씩 부풀었다. "제2왕자님이 형님보다 낫다고 유모가 그랬대요." "유모가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 거야." "제1왕자님은 사부가 셋인데 그 정도밖에 안 된다니." 말은 돌고 돌면서 살이 붙었다. 처음엔 그냥 "형님보다 낫으시네요"였던 말이, 어느새 "형님보다 훨씬 낫다", "천재다"까지 번져 있었다. 나는 그 소문이 처음 귓가에 들려왔을 때,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빨래를 하던 손이 순간 멈췄다. 옆에서 다른 궁녀들이 그 얘기를 하며 재잘거리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내 얼굴을 슬쩍 보더니 물었다. "언니, 진짜 그렇게 말했어요?" "어, 그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어색하게 웃고 넘겼다. '아니,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그냥 아이 옆에서 나온 칭찬 한마디였다. 형제를 비교하려는 의도도, 누구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도 없었다. 그런데 그 말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소문이라는 건 원래 원본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라는 법이었다. 한 번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기 시작하면, 그 말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누가 어떻게 옮기고,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부풀리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소문의 씨앗은, 이미 궐 담장을 넘어 조정 대신들의 술자리까지 퍼져 나가고 있었다. 며칠 후, 나는 우연히 지나가던 내관에게서 그 얘기가 벌써 대신들 입에까지 오르내린다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놓칠 뻔했다. '이거 큰일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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