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최상궁이 나를 다시 부른 건, 정도헌 학자를 만나고 온 다음 날이었다.
장소는 지난번과 같은 후원 뒤편의 작은 정자였다. 아침 일찍부터 불려 나온 탓에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풀숲을 지나야 했고, 치맛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발목에 감겼다.
'이 시간에 부르실 거면 미리 말씀이라도 해주시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걸음을 서둘렀다. 최상궁이 나를 함부로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최상궁은 정도헌과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였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은밀히 도움을 청했다고 했다.
정자에 도착하자 최상궁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표정이 평소보다 더 굳어 있었다.
"정 학자님이 며칠 전 국왕 전하께 진언을 올리셨다."
최상궁이 낮게 말했다.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한서준의 실수를 짚었지. 아이들의 비교를 부추기지 말라고."
정도헌은 조정에서 가장 이름난 학자였다. 젊은 시절 과거에서 장원을 차지한 뒤로, 사십 년 가까이 조정의 학문을 도맡아 온 인물이었다. 성정이 곧고 아첨을 모른다는 평이 있었는데, 그 성정 때문에 정적도 많다고 들었다.
그런 정도헌이 직접 나서서 한서준의 교육 방식을 지적했다는 건, 나름 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일이었다.
"국왕 전하께서는 뭐라 하셨답니까."
"들으셨지. 듣기만 하셨어."
나는 그 말의 뉘앙스를 바로 알아차렸다.
들었다는 것과 받아들였다는 것 사이에는, 궐 안에서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듣기만 했다는 건, 결국 아무것도 안 바뀐다는 소리네.'
'그러게 진작 좀 신경 쓰시지, 애 하나가 매일 눈물바람인데.'
하지만 최상궁은 완전히 포기한 얼굴은 아니었다.
"작은 균열이라도 낸 거야. 다음이 있으면 그 균열을 넓히는 거지."
그 말을 하는 최상궁의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걸 못 본 척했다.
며칠 뒤, 나는 처음으로 한서준을 직접 만났다.
한서준은 이헌의 방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 키에 마른 체형, 늘 단정하게 매어 놓은 도포 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스승이라는 자리가 어울리는 사람이긴 했다.
"유모님이 하신 그 말씀, 저도 들었습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퍼질 줄은 몰랐습니다."
"압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한서준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제가 이헌 왕자님을 너무 자랑스러워한 게 문제였습니다. 매번 형님 왕자님과 비교하며 감탄한 게, 결국 이렇게 굴레가 됐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지요."
"유모님은 잘못하신 게 없습니다."
"있습니다. 저도 속으로 비교했으니까요. 겉으로 안 했다고 안 한 게 아니지요."
한서준이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솔직하시군요."
"솔직해서 좋을 것도 없는데요."
'그냥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으면 편했을 걸.'
우리는 서로 잘못을 나눠 짊어지는 대화를 나눴지만, 그 대화가 실제로 상황을 바꾸는 건 아니었다.
말은 이미 궐 안을 다 돌았고, 이제 우리 둘이 무슨 말을 해도 소문의 방향을 되돌릴 수 없었다.
'말이라는 게 참 무섭다. 한번 퍼지면 주워 담을 방법이 없어.'
그 대신, 최상궁은 조금 더 현실적인 방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왕비님께 직접 진언을 올릴 생각이야."
최상궁이 말했을 때,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을 리가. 하지만 안 하면 더 안 괜찮아지겠지."
"혹시 잘못되면……"
"그럼 나만 다치는 거지. 너는 신경 쓰지 마라."
그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나는 그때는 다 헤아리지 못했다.
최상궁의 진언은 조심스러웠다.
왕비 앞에서 직접 '이헌 왕자를 과대평가하지 마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말은 왕비의 자존심을 건드릴 뿐이었고, 자칫 최상궁 본인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왕비님께서도 예전에 왕태자비 시절, 시누이분들과 비교당하며 힘드셨던 걸 기억하실 겁니다. 그 마음을 두 왕자님께도 헤아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왕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고 했다. 최상궁의 말에 따르면 그 침묵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고 했다.
그리고 짧게 대답했다.
"알겠다."
그 두 마디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나는 최상궁의 표정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완전한 무시도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흔들렸다면, 다음 기회가 있다는 뜻이지.'
'이 정도면 오늘은 성공이다. 잘하셨어요, 상궁님.'
하지만 그 작은 성공의 여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날, 조정에서는 이강 왕자를 두고 새로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번엔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제1왕자님이 스승들 앞에서 자주 눈물을 보이신다더라."
"그 정도로 어려운 걸 배우시는 것도 아닌데."
"천재 동생을 둔 죄지, 뭐."
"둘째 왕자님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신다는데, 첫째는 하나를 가르쳐도 겨우 절반이라 하더라."
나는 그 소문을 듣고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다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한서준과 나눈 대화도, 최상궁의 진언도, 이미 굴러가는 여론의 방향을 완전히 되돌리기엔 너무 미약했다.
'이 정도면 그냥 물살에 휩쓸리는 거잖아. 무슨 수로 막아.'
그리고 그날 저녁, 정도헌이 최상궁을 다시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최상궁의 부름을 받고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었다.
정도헌의 얼굴은 지난번보다 훨씬 더 지쳐 보였다.
"이강 왕자님이 조정 대신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뭔가를 보여줘야 할 것 같습니다."
정도헌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보여준다니요, 뭘 말입니까."
"실력이오. 두 왕자님 모두의, 있는 그대로의 실력."
그 말을 전해 들은 순간,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실력을 보여준다는 것.
그건 곧 두 왕자를 조정 대신들 앞에 나란히 세워 비교하겠다는 뜻이었다.
"그건 위험하지 않습니까. 지금도 이미 비교로 아이가 상처받는데, 대놓고 비교하는 자리를 만들자는 겁니까."
내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커졌다.
"압니다. 위험합니다."
정도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소문만으로 판이 짜이는 것보다는, 정직하게 보여주고 그 판을 깨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소문을 잠재우려는 시도가, 결국 소문을 확정 짓는 자리로 변할 수도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이거 잘못하면, 오히려 굴레를 더 단단하게 굳히는 꼴이 될 텐데.'
최상궁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잠시 말을 잃었다.
정자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촛불 그림자가 세 사람의 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최상궁이 겨우 그렇게 말했다.
정도헌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뒷모습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이헌의 방문 앞에 서서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아이의 옅은 숨소리를 들었다.
아직 여섯 살,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아이였다.
작은 손이 이불 밖으로 살짝 빠져나와 있었다. 나는 그 손을 조심스레 다시 넣어 주었다.
'네가 이 판이 얼마나 무서운 판인지 알기나 하니.'
그 방문 너머로, 나는 앞으로 벌어질 대결의 무게가 이미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헌의 숨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평온함이 오래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