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결혼식은 그야말로 형식적이었다. 성의 작은 예배당은 오래 방치된 듯 서늘한 냄새를 풍겼고,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들어오는 겨울 햇살마저 인색하게 흩어졌다. 신관이 낮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서약문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이서연은 옆에 선 남자를 흘깃 올려다보았다. 선우진은 여전히 갑옷을 채 벗지 못한 몰골이었다. 흉갑 위로 흙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고, 어깨에는 방금 전투를 마치고 온 것처럼 검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그의 옆얼굴은 세필로 그린 초상화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짙은 눈썹 아래 가라앉은 눈동자는 안개 낀 새벽 숲을 닮아 있어서, 도무지 지금 자신의 결혼식을 치르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이서연 쪽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드레스를 갈아입을 시간조차 없어 마차에서 내린 여행 복장 그대로 예식에 참여해야 했으니까. 신관이 반지를 내밀었을 때, 선우진은 손끝 하나 떨림 없이 그것을 받아 끼웠고, 이서연은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결혼, 계약서 서명이랑 뭐가 다르지…….' 하객이라 부를 만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영지의 집사와 몇몇 기사들이 예배당 뒤편에 무표정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 전부였고, 누구 하나 축하의 말을 건네는 이도 없었다. 이서연은 그 초라함에 상처받기보다는 오히려 안도했다. 성대한 결혼식만큼 뒤따르는 사교 의례도 없다는 뜻이었으니, 이 정도면 감사할 지경이었다.
식이 끝나자 신관은 서둘러 자리를 떴고, 기사들도 각자의 임무로 흩어졌다. 선우진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도, 축하의 말을 건네지도 않은 채 그대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시오." 짧은 한마디가 전부였다.
* * *
선우진이 그녀를 데려간 곳은 성의 서재였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이서연은 잠깐 숨을 멈추었는데, 서재는 놀랍도록 넓었지만 책장의 절반은 텅 비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에는 두꺼운 병서와 낡은 지도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마치 이 사람의 인생 자체가 그런 모양이겠구나, 하고 이서연은 생각했다. 채워야 할 자리는 넓은데, 정작 채운 것은 전쟁뿐인.
"할 말이 있으니 앉으시오." 선우진이 책상 너머의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목소리에는 억양이라 할 것도 없었다. 이서연은 조심스레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아 옷매를 정리했다.
"이번 결혼은 두 가문의 이해관계로 이루어진 것이오." 그가 손깍지를 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애정을 기대하지 않으며, 당신도 나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으면 하오." 그 목소리는 마치 영지의 세금 명세서를 낭독하는 듯 사무적이었다.
이서연은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결혼식장에서 이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하지만 그녀는 대신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럼…… 서로 원하는 걸 먼저 말하고, 그다음에 조율하는 게 낫겠네요. 계약이니까요." 선우진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것이 불쾌함인지 흥미인지 이서연으로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원하는 게 있소?"
"네. 저는 매일 최소 세 시간의 연구 시간이 필요하고, 사교 모임에는 되도록 참석하지 않고 싶어요." 이서연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조건을 나열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서재의 텅 빈 책장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 책들을 둘 서재 공간이 필요해요. 지금 이 서재의 절반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어차피 비어 있잖아요."
선우진은 잠시 그녀를 응시했는데, 그 눈빛에서 놀라움인지 경계심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당신도 사교를 싫어하오?"
"싫어한다기보다…… 그, 그럴 시간에 사료를 한 줄 더 읽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무도회에서 세 시간 서 있는 것보다는요." 이서연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선우진의 입가에 아주 잠깐,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는데, 그것이 웃음이었는지 비웃음이었는지 그녀로서는 판단할 수 없었다.
"좋소. 그 조건이라면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소. 나 역시 당신과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는 데는 관심이 없으니." 그는 그렇게 말하며 책상 위의 종이 한 장을 끌어당겨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이서연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 사람은 정말로 지금 결혼 서약서 대신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실소가 나올 뻔했다.
합의는 그렇게 놀랍도록 빠르게 이루어졌다. 서로 최소한의 간섭만 하며 각자의 영역을 지키는 것, 식사 자리는 필요할 때만 함께하는 것, 영지 내 공식 행사에는 형식적으로만 동석하는 것, 그리고 서재의 절반은 이서연의 소유로 인정하되 서고 보수 비용은 반씩 부담한다는 항목까지 덧붙었을 때, 이서연은 속으로 은근한 계산을 해 보았다. '책장 보수비가 은화 몇 닢이더라…… 뭐, 나쁘지 않은 거래네.' 그녀는 속으로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냉담한 남자와 정말로 평생을 이렇게 지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 당장은 연구 시간을 확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 * *
방을 나서며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하은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녀는 이서연의 시녀이자 유일하게 편하게 말을 나눌 수 있는 상대였는데, 표정에는 걱정과 궁금함이 반쪽씩 섞여 있었다.
"어떠셨어요, 각하께서는? 무섭지 않으셨어요?" 유하은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음…… 나쁘지 않아. 최소한 잔소리는 안 할 사람 같아. 오히려 계약서에 도장 찍는 기분이었어." 이서연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유하은은 그 대답에 안심한 듯 작게 웃었지만, 이서연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이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것이 안도인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복도 창밖으로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그 하얀 조각들이 성벽 위를 조용히 뒤덮어가고 있었다. 이서연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 눈발을 바라보았는데, 방금 서재에서 나눈 사무적인 대화가 마치 저 눈처럼 금세 녹아 사라질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저 눈처럼 쌓이고 쌓여 언젠가는 발밑을 뒤덮을 것 같은 예감이 스쳤다. 그녀는 그 예감을 애써 떨쳐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