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냉정한 변경백의 서재 신부

4화

그 후로 몇 주간, 이서연과 선우진의 일상은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겹치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이서연이 서재에서 구술 채록 기록을 정리하는 동안 선우진은 맞은편 책상에서 영지의 회계 서류를 검토했는데, 서로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종이 넘기는 소리와 깃펜이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오가는 그 침묵조차 낯설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같은 방을 나눠 쓰는 어색함뿐이었으나, 이서연은 자신이 문서를 읽다가 막힐 때면 무심코 맞은편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고, 선우진 역시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그녀가 낡은 책장을 넘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저녁이면 짧은 식사를 함께하며 각자의 하루를 짧게 언급하는 것도 어느새 정해진 순서처럼 자리를 잡았다. 이서연은 저녁 식사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서재 문을 두드리는 습관이 생겼고, 선우진 역시 그녀가 늦게까지 책을 붙잡고 있으면 굳이 촛불을 새로 가져다주는 일이 잦아졌다. "불이 다 됐소." 짧은 한마디를 던지고 새 촛불을 놓아둔 뒤 아무 말 없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그 무뚝뚝함이, 이서연은 처음엔 그저 영지 관리자로서의 책임감이려니 여겼지만, 언제부턴가 그 배려가 유독 자신에게만 향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다. 창밖으로는 새벽부터 쌓인 눈이 서재 창틀 위까지 두툼하게 덮여 있었고, 벽난로의 온기도 그 냉기를 다 밀어내지 못해 이서연은 어깨에 담요를 두른 채 발판 위에 올라 높은 서가의 문서를 꺼내던 중이었다. 오래된 가죽 장정이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순간, 발판이 삐끗하며 균형이 무너졌고, 몸이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지려는 순간 누군가의 팔이 그녀의 등을 받쳐 들었다. "조심하시오." 선우진이었다. 그는 마침 서고를 지나가던 참이었고, 이서연을 안정적으로 세워준 뒤 손을 떼려는데, 그 짧은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서연은 그의 진청색 눈동자가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안개 낀 겨울 숲처럼 깊고, 그 안에 뭔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온기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는데, 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의 팔이 등을 받치고 있던 시간은 채 몇 초도 되지 않았을 텐데, 이서연에게는 마치 시간이 늘어져 붙잡힌 것처럼 느껴졌다. "고, 고맙습니다." 이서연이 얼른 몸을 세우며 말하자, 선우진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손을 떼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판이 낡았소. 새로 가져다주겠소." "아, 괜, 괜찮아요. 제가 조심성이 없어서……" 두 사람은 잠시 어색하게 서 있었는데, 발판 아래 흩어진 종이들을 이서연이 허둥지둥 주워 담는 사이 선우진이 몸을 숙여 함께 종이를 집어주었고, 손끝이 스칠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두 사람은 또 한 번 서로의 손을 의식하며 얼른 떨어졌다. 선우진이 먼저 시선을 돌리며 서재를 나섰다. 이서연은 그가 나간 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등에 아직 남아 있는 그의 온기를 느끼며 저도 모르게 볼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이게 뭐지. 그녀는 애써 그 감정을 정확히 명명하지 않은 채 다시 문서로 시선을 돌렸지만,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한참을 같은 문단만 되풀이해 읽었다. 급기야는 방금 전 상황을 곱씹으며 발판 수리비가 얼마나 나올지, 낡은 나무를 새로 짜 맞추는 데 목수를 불러야 하는지까지 쓸데없는 계산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헛웃음이 났다. 발판 걱정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한편 선우진 역시 복도를 걸으며 자신의 손바닥에 남은 감각에 신경이 쓰였는데, 그것이 단순한 접촉 이상의 무언가로 느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에 거리를 두어 왔고, 그 이유를 굳이 되짚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저 자작 영애는, 어딘가 다른 여자들과 달랐다. 사교에는 무심하고, 오직 낡은 문서와 잊힌 이야기에만 눈을 반짝이는 그 태도가,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 한구석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녀가 발판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그 짧은 순간, 그의 몸이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자식…… 아니,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두 사람은 평소보다 유난히 말이 없었다. 이서연은 국그릇을 앞에 두고 괜히 숟가락만 만지작거렸고, 선우진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듯 창밖의 눈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녀가 새 접시를 내려놓고 나가는 짧은 순간에도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는데, 그 부자연스러운 배려조차 오히려 서로의 존재를 더욱 의식하게 만들었다. 침묵이 흐르는 식당 안, 벽난로의 장작이 타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렸고, 창밖으로는 눈이 소리 없이 쌓여가고 있었다. 이서연은 문득 낮에 그의 팔에 안겨 있던 그 짧은 순간을 다시 떠올렸고, 선우진 또한 그녀의 손끝이 스치던 감촉을 잊지 못한 채 애꿏은 국그릇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 조용한 긴장이 두 사람 사이에 새로운 감정의 씨앗을 심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두 사람 모두 완전히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창밖의 눈은, 그 씨앗이 자라날 시간을 벌어주려는 듯 그날 밤 늦도록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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