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대길산, 숲 한가운데.
짐승의 울음소리가 멀어진 것도,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강우를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강우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기운이었다. 짐승들은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더 큰 무언가에 이끌리듯, 모두 같은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진동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하나가 아니라 수십, 수백의 발걸음이 한 방향으로 쏠리고 있다는 것을.
그 방향은, 강우가 쫓던 초록빛 불꽃이 향하던 곳과 같았다.
'스으윽...'
나뭇가지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바람에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썩은 나뭇잎, 오래된 흙, 그리고 그 밑에 깔린 낯선 향—어딘가 비릿하면서도 달큰한, 이름 붙일 수 없는 기운이었다. 강우는 코를 찡그렸다. 십육 년 동안 눈이 없이 살아온 그에게 냄새와 소리, 촉각은 세상을 읽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감각이 한목소리로 경고하고 있었다.
이곳은 위험하다.
그러나 발은 멈추지 않았다.
강우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나뭇가지가 팔뚝을 긋고 지나갔지만 아프지 않았다. 마음은 이미 저 앞, 초록빛 불꽃이 있는 곳에 가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발밑의 흙이 달라졌다. 부드럽고 축축한 느낌 대신, 단단하고 오래된 돌바닥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강우는 발을 멈추고 무릎을 굽혀 손을 뻗었다.
차가웠다. 그리고 매끈했다.
손을 뻗어 주변을 더듬자, 거대한 나무의 뿌리가 땅 위로 솟아 있는 것이 만져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뿌리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얽혀 있었다. 손끝으로 그 결을 따라가자, 뿌리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대체 얼마나 큰 나무이기에 뿌리 하나가 이렇게 굵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한가운데, 초록빛 불꽃이 멈춰 있었다.
처음이었다. 십육 년 동안 늘 흔들리고 도망치던 불꽃이, 지금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강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불꽃을, 이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히던—혹은 인도하던—이 존재를 마침내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예감이 온몸을 저리게 했다.
강우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이 불꽃에 닿기 직전,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스쳤다. 뜨겁지 않았다. 열기도, 냉기도 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 마치 늘 그래왔던 것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번쩍!'
눈앞이 폭발하듣 밝아졌다.
강우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감각이었다. 빛이라는 것이, 색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눈에, 세상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올랐다. 뭔가가 눈 안쪽에서부터 밀려들어 뇌를 관통하는 것 같았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색채들이 뒤섞이고 부서지며 폭풍처럼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아픔이라기보다는, 존재 자체가 뒤집히는 감각이었다.
"으...!"
그는 눈을 감싸며 무릎을 꿇었다.
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숨이 턱 막혔다. 십육 년간 어둠 속에서만 살아온 몸이 갑작스러운 빛의 침공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손톱이 눈두덩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눌렀지만, 소용없었다. 빛은 이미 그의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다시 눈을 떴을 때, 흐릿한 형체들이 서서히 초점을 맞춰갔다.
처음엔 그저 얼룩덜룩한 색의 뭉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 뭉치들이 서서히 경계를 갖추고, 깊이를 갖추고, 형태를 갖췄다.
거목이었다.
하늘을 가릴 듯 뻗은 가지, 이끼로 뒤덮인 거친 나무껍질, 뿌리 사이사이로 은은하게 빛나는 이끼불—그 모든 것이 실제였다. 강우는 처음으로 자신의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나무는 상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컸다. 줄기 하나의 둘레가 성인 남자 열 명이 손을 맞잡아도 두르지 못할 정도였다. 가지들은 하늘 저편까지 뻗어 있었고, 그 사이로 스며드는 옅은 달빛이 이끼불의 초록빛과 뒤섞여 기묘한 색조를 만들어냈다.
"이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강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의 주름, 손톱의 결, 그 위를 스치는 실낱같은 빛의 반사—모든 것이 낯설고도 익숙했다. 손이란 것이 이렇게 생겼구나. 세상이란 것이 이렇게 넓구나.
그리고 그 거목의 뿌리 사이, 오래된 청동 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항아리는 낡고 녹이 슬어 있었지만, 표면에 새겨진 문양만은 여전히 선명했다. 뒤엉킨 용의 형상, 그리고 그 중심에 새겨진 일곱 개의 구멍. 강우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손을 뻗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항아리를 보는 순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물건을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었다.
"...가져가지 마시오."
낮고 삐걱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우는 흠칫 놀라 손을 멈췄다. 목소리는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무 자체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기도, 바람 속에 실려 오는 것 같기도 했다.
거목의 나무껍질 일부가 서서히 갈라지며, 그 안에서 희미한 형체가 드러났다.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나무와 뿌리가 뒤섞인 형상이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옅은 빛무리만 어른거렸다.
강우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눈으로 본 첫 번째 존재가 이런 것이라니.
"나는... 이 항아리를 지켜야 하오."
목소리는 나무의 갈라진 틈에서 새어 나왔다. 마치 오래된 문이 삐걱이며 열리는 소리 같았다.
"당신은..."
"수만 년을... 이 산에서 살았소."
나무 정령이었다. 강우는 침을 삼켰다. 상처투성이의 몸통에서 검은 진액 같은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최근에 입은 상처처럼 보였다. 진액은 뿌리를 타고 흘러 땅에 스며들었고, 그 자리마다 이끼가 검게 죽어가고 있었다.
"다친 겁니까."
강우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이 낯선 존재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상처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놈이 왔었소. 이미... 한 번."
나무 정령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마치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지는 듯했다.
"소백령... 그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 항아리 때문이었소."
"소백령이 누굽니까."
나무 정령은 대답 대신 가지를 살짝 흔들었다. 마치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흔들리는 가지에서 마른 잎사귀 몇 개가 떨어져 강우의 발치에 내려앉았다.
"작고... 흰 새였소. 이 산에서 유일하게... 내게 말을 걸어준 존재였소."
정령의 목소리에는 그리움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강우는 그 낯선 감정을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 새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모르오. 그날 이후로... 다시는 보지 못했소."
정령의 빛무리 같은 눈이 흐려졌다.
"그놈이 이 산을 뒤덮은 뒤로... 많은 것들이 사라졌소. 새도, 짐승도, 사람도."
"그놈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강우가 다시 물었다. 그러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땅이 다시 흔들렸다.
'쿠구구구궁!'
이번엔 훨씬 크고 가까운 진동이었다. 뿌리 사이의 흙이 들썩였고, 이끼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나무 정령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상처에서 흐르던 진액이 뚝뚝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왔구나."
목소리에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강우는 그것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처음 눈을 뜬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순간에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뭐가 옵니까."
강우가 물었지만, 나무 정령은 답할 시간이 없었다.
숲의 저 안쪽에서, 수백 개의 붉은 눈동자가 동시에 떠올랐다.
짐승들이었다. 마을 근처로 내려와 사람을 해쳤다는 그 정체 모를 짐승들이, 모두 한 방향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 붉은 빛은 마치 어둠 속에 박힌 수백 개의 등불 같았다. 하나둘씩 늘어나던 것이 순식간에 수백을 넘어섰다. 강우는 처음 보는 그 광경 앞에서 숨을 쉬는 법을 잊었다.
그 방향은, 강우가 서 있는 자리였다.
"...!"
강우는 숨을 들이켰다.
짐승들 사이로, 인간의 형체가 서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걸음걸이는 느렸다. 그러나 그 걸음 하나하나에, 짐승들이 길을 비켜주듯 양옆으로 갈라졌다. 마치 그 형체가 이 모든 짐승들의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무 정령의 몸에서 흐르던 검은 진액이 뿌리를 타고 급격히 번져나갔다.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도망치시오..."
정령이 삐걱이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지금 당장...!"
그러나 강우의 발은 땅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짐승들의 붉은 눈동자와, 그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형체를 응시한 채, 강우는 그저 숨죽여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