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눈먼 아이의 초록 불꽃

5화

'쐐애애액!' 다섯 개의 붉은 궤적이 허공을 갈랐다. '콰가가강!' 나무 정령의 뿌리가 순식간에 잘려 나갔다. 두껍고 오래된 뿌리들이 마치 두부처럼 잘려 바닥에 널브러졌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땅속 깊이 파고들었을 뿌리들이었다. 그 하나하나가 산의 뼈대와도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이 단 한 번의 손짓에 잘려나가고 있었다. "...크윽!" 나무 정령이 신음을 흘렸다. 검은 진액이 잘린 자리에서 뿜어져 나왔다. 진액은 마치 피처럼 검붉게 번지며 지면을 적셨고, 그 냄새는 썩은 흙과 오래된 나무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강우는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태어나서 처음 본 것이, 삼만 년을 산 존재가 찢겨나가는 모습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현실이 아니라 악몽처럼 느껴졌다. "이거였구나. 삼만 년치 힘이라는 게." 범묘왕이 실망한 듯 코웃음을 쳤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흥미를 잃지 않은 채 나무 정령을 훑고 있었다. "별거 없네. 나는 좀 더 재밌는 걸 기대했는데 말이야." "...아직... 끝나지 않았소." 나무 정령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몸통 전체에서 균열이 가듯 우지끈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은 뿌리들이 지면을 뚫고 솟아올라 범묘왕을 휘감으려 했다. 그 움직임은 마치 거대한 뱀들이 일제히 달려드는 것과 같았다. 범묘왕은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쳤다. 그의 손톱이 붉은 기운으로 뒤덮이며 길게 자라났다. "제이식, 혈조참(血爪斬)—파(破)." '퍼버벙!' 뿌리들이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나무 정령의 몸통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잘린 뿌리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크아아악!"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산 전체를 흔들었다. 새들이 놀라 날아올랐고, 근처의 나무들이 그 울림에 잎을 떨어뜨렸다. 강우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달려갔다. 머릿속에서는 위험하다는 경고가 울리고 있었지만, 발은 이미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만해!" "응?" 범묘왕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강우를 돌아봤다. 그의 입꼬리가 비틀리듬 올라갔다. "나무를 지키겠다고? 웃기는군. 그 나무는 어차피 십육 년을 쫓아다닌 항아리 하나 지키자고 널 이용하려던 놈이야. 그런 놈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거냐?" "...그런 게 아니오." 나무 정령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거의 갈라져 나오는 바람 소리 같았다. "나는... 그저 다시... 만나고 싶었을 뿐이오. 소백령을..." 그 말에 범묘왕의 눈빛이 잠깐 흐려졌다. 아주 짧은 순간, 그의 얼굴에 무언가 다른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그리움 같기도 했고, 오래된 상처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치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는 듯, 그는 표정을 지워버렸다. "그 새 얘기는 지겹다. 삼만 년 동안 몇 번을 들었는지."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오래도록 반복되어 들었을 이름, 그리고 그 이름이 불러오는 무언가에 대한 거부감이 함께 느껴졌다. '쐐액!' 또 한 번 손톱이 허공을 갈랐다. '콰직!' 나무 정령의 몸통 한가운데가 크게 갈라졌다. 안에서 빛나는 무언가—항아리와 이어진 뿌리의 핵심 부분이 드러났다. 은은한 푸른빛을 뿜어내는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나무 정령이 자신의 몸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여기 있었네." 범묘왕의 얼굴에 광기 어린 웃음이 번졌다. 그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뜩였다. "그동안 어디 숨겨놓은 건지 몰랐는데. 몸속이었다니. 이렇게 뻔한 곳에." "안 돼..." 나무 정령이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웅크렸다. 항아리를 감싸려는 몸짓이었지만, 이미 상처로 뒤덮인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잘려나간 뿌리들 사이로 검은 진액이 계속해서 흘러나왔고, 그 양은 이제 나무 정령의 생명력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짐작하게 만들었다. "안 된다고 해서 안 될 것 같으냐." 범묘왕이 손을 뻗었다. 그의 팔이 뻗어나가는 궤적을 따라 붉은 기운이 실처럼 이어졌다. 그 순간, 강우가 항아리를 향해 몸을 던졌다. "...!" 먼저 항아리를 품에 안은 것은 강우였다. 그의 손끝이 항아리에 닿는 순간, 이상하게도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를 안는 듯한 감각이었다. 범묘왕의 눈이 순간 커졌다. "...하, 이거 재밌어지는군." 그가 뻗었던 손을 슬며시 거두었다.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사냥감을 살피는 짐승의 눈빛이었다. 그의 시선이 강우의 가슴께로 옮겨갔다. "그런데... 이 냄새." 범묘왕이 코를 킁킁거렸다. 그의 콧구멍이 크게 벌어졌다 좁아지길 반복했다. "십 년 전에도 이상했는데, 지금은 더 진하군." "...무슨 소리를..." 강우가 항아리를 끌어안으며 뒤로 물러났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네놈 몸 안에서 나는 냄새다." 범묘왕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대신 짐승 특유의 탐욕이 눈동자 가득 차올랐다. 그의 동공이 순간 세로로 좁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설마... 그게... 그 안에 있었다니." 그가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왔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겁게 지면을 짓눌렀고, 그가 다가올수록 주변의 공기가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십육 년을 헛짚었군. 항아리가 아니라, 사람이었어." "...뭐라고?" 강우가 몸을 떨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십육 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무 정령이, 그리고 어쩌면 다른 무언가가 쫓았던 것이 항아리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물러서시오...!" 나무 정령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뿌리 하나를 뻗었다. 그 뿌리는 이미 절반쯤 갈라져 있었고, 움직임도 예전만큼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범묘왕은 그것을 손등으로 가볍게 쳐냈다. '퍽!' 뿌리가 힘없이 튕겨 나갔다. 나무 정령의 몸통에서 또 한 번 검은 진액이 뿜어져 나왔다. "방해하지 마라, 늙은 나무." 범묘왕의 눈이 완전히 강우에게 고정되었다. 이제 그에게 나무 정령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강우, 그리고 강우가 끌어안고 있는 항아리에 향해 있었다. "이리 오거라, 꼬마." 그의 손끝에서 다시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마치 뜨겁게 달아오른 쇠처럼, 그 기운은 이글거리며 손톱 끝에서부터 손목까지 타고 올라갔다. "...!!" 강우는 뒤로 물러날 곳이 없었다. 등 뒤는 이미 갈라진 나무 정령의 몸통이었다. 그 몸통에서는 여전히 검은 진액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온기 없는 축축함이 강우의 등을 적셔왔다. 강우는 항아리를 품에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러나 자신의 몸 안에서 난다는 그 냄새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두려움만이 커져갔다. 십육 년. 그 세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쫓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범묘왕의 손이 서서히 다가왔다. 그 손끝의 붉은 기운이 강우의 눈앞에서 이글거렸다. "자, 이제 그 냄새의 정체를 좀 보여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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