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숲 전체를 채우고 있던 붉은 눈동자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자리를 비켰다.
수백 개의 눈이 동시에 옆으로 물러나는 광경은 기이했다. 짐승들의 움직임에는 어떤 급함도, 저항도 없었다. 그저 복종하듯, 아니 두려워하듯 길을 터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로, 사람의 형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나뭇잎을 밟는 소리도, 흙을 가르는 소리도 없이, 그저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걸음이었다. 강우는 그 걸음걸이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인간이라면 저렇게 걸을 수 없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등허리까지 늘어졌고, 옷자락은 짙은 황금빛과 검은빛이 뒤섞인 무늬로 덮여 있었다. 무늬는 얼핏 보면 옷감의 문양 같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살아 있는 것처럼 옷자락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그 자체로 살가죽인 것처럼.
눈동자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세로로 좁게 갈라진, 짐승의 눈이었다. 노란빛을 띤 눈동자 안에서 동공이 스르르 좁아졌다 넓어졌다.
"...범묘왕."
나무 정령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거대한 몸체를 이루는 뿌리와 줄기가, 마치 겁먹은 짐승처럼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삼만 년을 살아온 존재가, 저 한 사람 앞에서 몸을 사리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늙은 나무."
남자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웃음 끝에 드러난 이는 사람의 것보다 훨씬 길고 날카로웠다. 마치 짐승의 아가리에서 뽑아낸 것 같은 이빨이었다.
"십육 년을 이 산을 뒤집었다. 냄새는 계속 났는데, 정작 실물은 코앞에서야 보이는군."
그의 시선이 청동 항아리에 닿았다.
눈동자가 순간 확 커졌다. 짐승이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콧구멍이 벌어지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래, 그거다."
"...가져갈 생각 마시오."
나무 정령이 몸을 일으켰다. 뿌리들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지면을 뚫고 나왔다. 굵기가 사람 몸통만 한 뿌리들이 서로 얽히며 항아리 주변을 겹겹이 감싸기 시작했다.
"삼만 년을 지켜온 것이오."
"지켜온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결국 못 지켰잖은가."
범묘왕이 코웃음을 쳤다.
그 말에 나무 정령의 잎사귀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바람이 없는데도, 마치 신경을 자극당한 것처럼.
강우는 그 순간 알아챘다. 저 목소리, 저 웃음소리, 저 말투—.
기억이 순식간에 되짚어졌다. 십 년 전, 이 산에서 정신을 잃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 흐릿하게 남아 있던,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았던 그 웃음소리.
"십 년 전..."
강우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당신인가."
범묘왕의 시선이 처음으로 강우를 향했다.
짐승의 눈이 강우의 얼굴을 훑고, 곧 몸통 전체를 훑었다. 마치 무언가를 감식하듯,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음?"
순간 범묘왕의 눈빛이 달라졌다. 사냥감을 살피던 눈이, 이제는 흥미를 담은 눈으로 바뀌었다.
"이 냄새는... 아니, 설마."
그는 천천히 강우에게 다가왔다.
짐승들이 길을 열어주듯 양옆으로 갈라졌다. 붉은 눈동자들이 강우를 향해 일제히 시선을 옮기는 것이, 마치 새로운 구경거리를 발견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십 년 전, 이 산에서 애송이 하나를 데리고 온 사내가 있었다. 손발을 다 못 쓰게 만들어서 돌려보낸 게 나였는데."
강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머릿속에서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조각조각 맞춰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절뚝거리는 걸음. 밤마다 신음을 삼키며 다리를 주무르던 모습. "괜찮다, 괜찮아"라는 말과 함께 애써 지어 보이던 웃음. 그 모든 것의 시작이, 바로 눈앞의 이 남자였다.
"...주장산."
"이름까지 기억할 필요는 없었는데, 뭐, 그 애송이가 너였나 보군."
범묘왕이 낮게 웃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즐겁다는 듯이.
"그런데 그때는 왜 못 죽였을까. 아, 맞다. 항아리 냄새가 그때부터 이상하게 진했었지. 산속 짐승 냄새랑 사람 냄새가 아니었어. 그래서 흥미가 생겨서 살려 보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이야."
그는 마치 오래된 추억을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 담담함이 강우에게는 더 끔찍하게 다가왔다. 저 남자에게는, 그날의 일이 그저 사냥터에서 있었던 하나의 재미있는 사건일 뿐이었다.
"...그날, 아버지를..."
강우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아버지의 다리를 그렇게 만든 게 당신이었어."
"아버지? 하하하하, 그 절뚝발이가 네 아비였나?"
범묘왕이 배를 잡고 웃었다. 웃음소리가 숲 전체에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짐승들도 덩달아 낮게 그르렁거렸다.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아쉽게 됐군."
강우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십 년간 쌓인 죄책감이, 이 순간 분노로 뒤바뀌고 있었다.
아버지가 다리를 저는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믿었던 십 년. 스스로를 원망하며 밤마다 이불 속에서 숨죽여 울었던 시간들. 그런데 그게 전부, 저 짐승 같은 놈의 손끝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강우의 속에서는 뭔가가 뒤틀리듯 끓어올랐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상대의 존재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눈으로 본 세상에서, 처음 마주한 것이 이런 압도적인 공포라는 사실이 잔인했다.
발끝부터 스며드는 한기가 있었다. 마치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 시야가 좁아지고, 숨소리가 자기 것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거칠어졌다.
"...!"
"어린놈이 눈빛은 살아 있네."
범묘왕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강우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 그럼 이제 그 항아리를 넘겨받아야겠는데."
"...비켜서지 않을 거요."
나무 정령이 뿌리를 세워 항아리를 감쌌다. 굵은 뿌리들이 서로 꼬이며 점점 더 촘촘한 방벽을 만들어갔다. 그 안쪽에서, 청동 항아리는 여전히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삼만 년 동안 단 한 번도 넘긴 적 없소."
"흐음. 그럼 어쩔 수 없지."
범묘왕의 목소리에는 아쉬움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당연한 일을 처리하듣, 지루한 어조였다.
범묘왕의 손톱이 갑자기 길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자라난 손톱이 순식간에 십여 센티미터를 넘어섰다. 검은빛을 띤 손톱 끝에서 붉은 기운이 스며 나왔다. 그 기운은 마치 손톱 자체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일렁였다.
"혈조참(血爪斬)."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
"오랫동안 이걸 못 써서 손이 근질거렸거든."
나무 정령의 뿌리가 방어하듯 앞으로 튀어 올랐다. 수십 갈래로 갈라진 뿌리 끝이 창처럼 날을 세우고, 항아리를 중심으로 원형의 방어막을 만들었다.
"막아 보시오."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각오가 동시에 섞여 있었다.
"막을 필요도 없어. 어차피 늙어빠진 나무니까."
범묘왕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의 붉은 손톱이 허공에 반원을 그리듯 천천히 들렸다.
강우는 그 순간, 자신이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눈. 십 년을 원망하며 살아온 존재를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이 그를 짓눌렀다.
'쉬이익!'
범묘왕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