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정령님, 제 스승 해주실래요?

1화

냉장고에 밥 세 숟갈이 남아있었다. 정확히 세 숟갈. 네 숟갈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세 번쯤 반복했다. 혹시 안 보이던 반찬이 갑자기 생겨나는 기적이 있을까 해서. 없었다. 당연히. 성경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다는데 왜 삼시세끼의 기적은 없는 걸까. 계산해보니 오늘 저녁까지 버티려면 저 세 숟갈을 아침저녁으로 쪼개 먹어야 했다. 숟갈을 반으로 가르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밥에다 무슨 미적분을 하고 있나 싶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전도서 9: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을 먹고] 웃기지 마라. 기쁨은 됐고 양이나 늘려달라고. 기쁨으로 먹으라니, 이 구절 쓴 사람은 최소한 삼시세끼는 걱정 안 했던 사람이 분명하다. 배부른 소리다. 진짜 배부른 소리. 나는 강준서다. 열일곱, 고아, 청천무학원 입학 예정자. '예정자'라는 말이 참 웃기다. 사실은 그냥 희망자다. 입학금으로 상급 투기석 열 개가 필요한데, 지금 내 수중엔 세 개뿐이었다. 상급 투기석 하나 가격이 웬만한 원룸 한 달 월세보다 비싸다는 걸 알게 된 날, 나는 하루 종일 웃었다. 웃지 않으면 울 것 같아서. 그날 이후로 나는 부동산 앱을 켤 때마다 투기석 시세부터 확인하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둘 다 오르기만 하는 게 어쩜 이렇게 닮았는지.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딱 한 가지를 부탁했다. "준서야, 아빠를 찾아야 혀." 사투리 쓰던 어머니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있다. 쇳소리 섞인,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다정한 그 목소리. "아빠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겄지만, 청천무학원 나온 사람들은 다 안다는 소문이 있어. 거기 인맥이 그래." 그 인맥이라는 게 등록금 몇 백만 원짜리 인맥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엄마, 그거 돈 많이 들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찾을게." 그때 어머니 손이 내 손을 꼭 붙잡았는데, 손끝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그 약속이 지금 내 목을 조르고 있다. 목을 조르는데 숨은 쉬어야 하니, 사람이 참 아이러니하게 살아진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입학 접수 마감이 정확히 한 달 남았다는 공고문을 다시 확인했을 때였다. 한 달. 삼십 일. 칠백이십 시간. 숫자로 쪼개니 더 무섭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 안에 상급 투기석 일곱 개를 더 구해야 한다. 일곱 개면 웬만한 중소기업 신입 연봉이다. 나는 신입도 아니고 백수인데. 게다가 4대 보험도 없는 백수다. 이력서에 뭐라고 써야 하나, '특기: 굶기, 경력: 없음'이라고 쓸까. 밤에 하는 짐꾼 알바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왔다. 하루 일당 오천 원, 그마저도 며칠에 한 번 있을까 말까. 그것도 물류창고 형님들이 인심 좋을 때나 던져주는 자리다. 곱셈을 해보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칠칠은 사십구, 사십구 곱하기 오천 원은... 계산기를 두드릴 필요도 없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이 방식으로는 절대 못 모은다. 백 년을 일해도 부족할 판이었다. [시편 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는 산이 아니라 학원 게시판을 향해 눈을 들었다. 산은 등산할 때나 오르는 거고,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등록금이지 등산이 아니었으니까. 거기 뭔가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있어야 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간절함이 사람을 게시판 앞으로 걸어가게 만든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청천무학원 정문 옆에는 커다란 나무 게시판이 있었다. 입학 요강, 수련생 모집, 각종 공고문이 빈틈없이 붙어 있는 그 판을, 나는 벌써 오십 번쯤 훑었다. 오십 번 봐도 새로운 게 안 보이면 그냥 없는 거다. 그건 취업 준비생이 채용공고 새로고침하듯이 매일같이 들여다봐서 하는 확실한 말이다. 정문 경비 아저씨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넬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오늘도 왔네." "오늘도 왔죠."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판 구석에 낡은 종이 한 장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다른 공고문들보다 색이 누렇게 바래 있었고, 누가 붙였는지도 모를 만큼 오래된 느낌이었다. 마치 몇 년 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은 임대 공고문처럼, 구석에서 조용히 삭아가고 있었다. 뭐지? 저게 왜 아직 붙어있지. 오십 번을 훑었는데 왜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건지도 이상했다. 어쩌면 이건 준비된 사람 눈에만 보이는 종이인가, 하는 실없는 생각도 잠깐 했다. 아니면 그냥 내가 여태 안 보고 지나쳤거나. 후자가 훨씬 그럴듯했다. 나는 그 종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초급 임무 — 완수 시 상급 투기석 열 개 즉시 지급.'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열 개. 정확히 내가 필요한 만큼.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로또 당첨 문자도 아닌데 왜 이렇게 손이 떨리는지. 그럴 리가. 세상에 그렇게 딱 맞아떨어지는 우연이 있을 리가 없다. 분명 뭔가 함정이 있을 거다. 드라마에서도 이런 식으로 딱 맞는 조건이 나오면 백 프로 뒤에 반전이 있었다. 나는 종이 아래쪽에 적힌 세부 조건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알았다, 이게 함정이 아니라 절벽이라는 걸. '대상: 1급 마수. 조건: 정수 열 개 확보. 참여 자격: 3급 투사 이상 참여 불가.' 숨이 턱 막힌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3급 투사 이상 참여 불가라니, 이건 약한 놈들한테나 던져주는 일이라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강한 사람은 애초에 참여할 자격도 없는, 약자 전용 도살장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는 1급 투사다. 제일 약한 등급. 등급표를 처음 봤을 때 이런 것도 등급이 나뉘는구나 하고 신기해했었는데, 이제는 그 등급이 곧 내 사망 확률표라는 걸 알겠다. 종이 맨 아래엔 작은 글씨로 이런 게 적혀 있었다. '10년간 완수자 9명.' 십 년에 아홉 명. 연평균 0.9명이라는 뜻이다. 확률로 치면 로또보다는 낫고 벼락 맞기보다는 좀 못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나머지는 다 어떻게 됐는지는 안 써있었다. 안 써있다는 게 더 무서웠다. 차라리 '실패 시 사망'이라고 대놓고 써놨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두려움이 슬그머니 등을 타고 올라왔다. 머리를 싸매쥐고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지나가던 수련생 몇몇이 나를 흘깃 보고 갔다. 저 자식 또 게시판 앞에서 저러네, 하는 눈빛으로. 알아요, 저도 제가 이상해 보이는 거. 하지만 계산은 이미 끝나 있었다. 죽거나, 굶거나, 아니면 저 종이에 손을 대는 것. 세 가지 선택지 중에 두 개는 어차피 죽는 길이고 하나만 살 확률이 있는 길이었다. 확률이 낮다고 안 걸을 수는 없었다. 다른 길이 없으니까. 나는 종이를 떼어냈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종이 질감이 생각보다 두껍고 뻣뻣해서, 마치 오래된 계약서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욥기 38:39, 네가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사냥하겠느냐] 사자는 무슨, 나는 지금 늑대 새끼 한 마리도 감당 못 할 것 같은데. 욥기를 쓴 사람은 최소한 나보다 사자 사냥 경험이 많았던 게 분명하다. 그래도 이게 유일한 길이라면, 가야 한다. 가야 한다는 말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주머니 속 상급 투기석 세 개가 서로 부딪치며 달그락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마치 재촉하는 것 같았다. 서둘러라, 시간이 없다, 하고. 셋밖에 없는 돌들이 부딪히는 소리치고는 꽤나 시끄럽게 들렸다. 아니면 내 심장 뛰는 소리가 그만큼 컸던 걸지도. 나는 종이를 품에 넣고 접수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멈추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아서 계속 걸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낡은 종이 한 장이 내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놓을 거라는 걸. 농담이 아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그날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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